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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광'''(李睟光, [[1563년]] [[3월 14일]]([[음력 2월 20일]])~ [[1629년]] [[1월 19일]](음력 [[1628년]] [[12월 26일]]))은 [[조선]] 중기의 왕족 출신 문신이자 [[성리학]]자, [[실학]]자, 외교관이다. 그는 실학의 1세대라 할 수 있으며, [[남인]]실학의 토대이기도 하다.
 
본관은 [[전주 이씨|전주]](全州)이며, 자는 윤경(潤卿), 호는 지봉(芝峯)이다.<ref name="역대">[http://people.aks.ac.kr/front/srchservice/viewSearchPPL.jsp?pItemId=PPL&type=L&pType=P&pSearchSetId=84982&pTotalSearchCount=1&pPosition=0&pRecordId=00500050004C005F0036004A004F0062005F00410031003500360033005F0031005F0030003000300039003800330031&pName=C774C218AD110028674E775F51490029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ref> 이수광은 뛰어난 외교력과 문장능력을 인정받아 28세 때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35세 때 진위사로 명나라 파견되었으며, 49세 때인 1611년에도 중국을 다녀왔다. 당시의 선진국 중국에서 그 문화를 보고 배우는 한편, 세 차례의 사행 기간 중에 안남(安南, 베트남)·유구(琉球, 류큐)·섬라(暹羅, 시암) 사신들과 교유하면서 국제적인 안목을 키울 수 있었다. 이수광에 대한 실록의 졸기(卒記)에는 "그가 중국에 사신으로 갔을 때 안남·유구·섬라의 사신들이 그의 시문을 구해보고 그 시를 자기 나라에 유포시키려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이수광이 당대에 국제적인 경쟁력을 갖춘 인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ref>신병주, 《조선 최고의 명저들》 휴머니스트(2006) 119쪽 {{ISBN|895862096X}}</ref>[[실학]]의 선구자로 여겨진다. 이수광은 다양한 분야의 학문을 연구하고 국가 증흥을 위한 사회, 경제정책을 수립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 그는 무엇보다도 실천, 실용의 학문에 힘썼다. 무실을 강조하면서 실생활에 유용한 학문을 섭렵하고 정리했다. 선현들의 사적을 모으는 한편 이를 현재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 고민했다. "지봉"이라는 호를 딴 《[[지봉유설]]》은 이러한 고민의 결과물이다.<ref>신병주《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 규장각 보물로 살펴보는 조선시대 문화사》 책과함께(2007) 303쪽 {{ISBN|9788991221284}} <!--“… 이수광은 다양한 분야의 학문을 연구하고 국가 중흥을 위한 사회, 경제정책을 수립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 그는 무엇보다도 실천, 실용의 학문에 힘썼다. 무실을 강조하면서 실생활에 유용한 학문을 섭렵하고 정리했다. 선현들의 사적을 모으는 한편 이를 현재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 고민했다. ‘지봉’이라는 호를 딴 《지봉유설》은 이러한 고민의 결과물이다.”--></ref> [[1614년]](광해군 6년) [[8월 27일]] [[위성공신|위성]][[원종공신]] 1등(衛聖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아들인 [[이민구]](李敏求)의 문하생은 [[남인]]의 거두이자 [[청남]]의 영수였던 백호 [[윤휴]]였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서울특별시|서울]] 출신.
1613년 계축옥사로 인목대비의 아버진 김제남이 사사되고, 인목대비의 아들 영창대군이 강화도로 유배되자, 관직을 떠나 낙향하였다.
 
이후 두문불출하고, 중국의 전적(典籍)과 자기의 견문을 토대로 동남아시아와 유럽 사정, [[로마 가톨릭교회|천주교]] 지식을 소개한《[[지봉유설]]》(1614년)을 지었다.<ref name="송건호"/>{{Rp|306}} (→[[조선의 대외 관계]]) [[1614년]](광해군 6년) [[8월 27일]] [[위성공신|위성]][[원종공신]] 1등(衛聖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1616년 [[순천]][[부사]]에 임명되어 발령되었는데, 1618년에는 인목대비가 폐비되어 서궁에 유폐되기까지 하자, 지방관 임기 3년을 마친 후에는 관직을 사양하고 [[수원]]으로 내려가 학문 연구와 집필에 전념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재등용되어 도승지·대사간을 지내고 이듬 해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조선 인조|인조]]를 [[공주시|공주]]로 모셨다. 당색에 치우치지 않은 관계로 [[인조 반정]] 이후에도 [[서인]]계열의 견제를 받지 않았다. [[이괄의 난]]이 진압된 뒤 1625년(인조 3년) [[사헌부]][[대사헌]]에 올랐다.
[[분류:조선의 번역가]]
[[분류:임진왜란 관련자]]
[[분류:원종공신]]
[[분류:전주 이씨]]
[[분류:병사한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