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천로: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편집 요약 없음
1번째 줄:
{{출처 필요|날짜=2010-7-11}}
 
'''차천노'''(車天輅, [[1556년]] ~ [[1615년]])는 [[조선]]의 문신이다. 본관은 [[연안]]. 자는 복원(復元), 호는 오산(五山)이다. [[임진왜란]] 때 [[광해군]]을 수행한 공로로 [[1614년]](광해군 6년) [[8월 27일]] [[위성공신|위성]][[원종공신]] 3등(衛聖原從功臣三等)에 책록되었다.
 
[[1577년]] 문과에 급제하고, 1583년 중시문과에 급제하여 두 번 과거에 급제하였다. 그러나 1586년 고향 사람 대신 [[과거 시험]]을 대리시험 봤다가 장원급제후 발각되어 명천으로 유배되기도 하였다. 화담 [[서경덕]]의 문인이다.
 
== 생애 ==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이다. [[선조]]10년(1577년) 문과에 급제하여 급제하여 개성교수(開城敎授)를 지냈고, 1583년 문과중시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586년 정자(正字)로서 고향 사람 여계선(呂繼先)이 과거를 볼 때 표문(表文)을 대신 지어주어 장원급제시킨대리시험으로 일이장원급제시켰다가, 나중에 발각되어 명천에 유배되었다가<ref>[http://sillok.history.go.kr/id/kna_11910027_001 《선조실록》 20권, 선조 19년 10월 24일 을유 4번째기사]</ref> 1588년 문장의 재주가 있어서 용서받고 승문원에 종사하였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na_12111021_004 《선조실록》 22권, 선조 21년 11월 21일 경오 4번째기사]</ref>
 
1589년 통신사 [[황윤길]](黃允吉)과 함께 일본에 다녀왔다. 그 때 4,000∼5,000수의 시를 지어 일본인들을 놀라게 하였다. 문장이 수려하여 [[명나라]]로 발송되는 대부분의 외교문서를 그가 작성하였는데, 문명이 명나라에까지 떨쳐 동방문사(東方文士)라는 칭호를 받았다. [[1792년]] [[정조]] 때 왕명으로 그의 저서를 간행하여 반포하게 하였다.
줄 10 ⟶ 12:
특히, 명사(明使)들이 문장의 속작을 실험하기 위해 미리 준비한 시에 거침없이 수응(酬應)하여 이름을 더욱 떨쳤다. 봉상시판관(奉常寺判官)을 거쳐 1601년 교리가 되어 교정청(校正廳)의 관직을 겸임했고, 광해군 때 [[봉상시]] 정(奉常寺正)을 역임하였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ua_12702003_005 《영조실록》 73권, 영조 27년 2월 3일 신미 5번째기사]</ref>
 
임진왜란 당시 [[광해군]]의 분조를 수행한 공로로 [[1614년]](광해군 6년) [[8월 27일]] [[위성공신|위성]][[원종공신]] 3등(衛聖原從功臣三等)에 책록되었다. 작시(作詩)에 뛰어나 [[한호]], [[최립]]과 함께 [[송도삼절]]이라 일컬어졌고, 문장에 뛰어나 아우인 [[차운로]](雲輅), 성균진사 [[마상원]](馬尙遠)과 함께 '양차일마(兩車一馬)'로 불렸다.
 
그의 무덤이 [[경기도]] [[과천시]] 문원동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