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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9년 통신사 [[황윤길]](黃允吉)과 함께 일본에 다녀왔다. 그 때 4,000∼5,000수의 시를 지어 일본인들을 놀라게 하였다. 문장이 수려하여 [[명나라]]로 발송되는 대부분의 외교문서를 그가 작성하였는데, 문명이 명나라에까지 떨쳐 동방문사(東方文士)라는 칭호를 받았다. [[1792년]] [[정조]] 때 왕명으로 그의 저서를 간행하여 반포하게 하였다.
 
특히, 명사(明使)들이 문장의 속작을 실험하기 위해 미리 준비한 시에 거침없이 수응(酬應)하여 이름을 더욱 떨쳤다. 봉상시판관(奉常寺判官)을 거쳐 1601년 교리가 되어 교정청(校正廳)의 관직을 겸임했고, 광해군 때 첨정, [[봉상시]] 정(奉常寺正)을 역임하였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ua_12702003_005 《영조실록》 73권, 영조 27년 2월 3일 신미 5번째기사]</ref>
 
임진왜란 당시 [[광해군]]의 분조를 수행한 공로로 [[1614년]](광해군 6년) [[8월 27일]] [[위성공신|위성]][[원종공신]] 3등(衛聖原從功臣三等)에 책록되었다. 작시(作詩)에 뛰어나 [[한호]], [[최립]]과 함께 [[송도삼절]]이라 일컬어졌고, 문장에 뛰어나 아우인 [[차운로]](雲輅), 성균진사 [[마상원]](馬尙遠)과 함께 '양차일마(兩車一馬)'로 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