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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가덕도왜성에 7월경 5천명의 병력을 본성과 지성에 주둔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ref>1593년(분로쿠 2년) 7월 27일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에게 보낸 朱印狀</ref> 그리고 윤9월 25일에는 이미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가덕도 축성을 마치고 귀국하려는 의사를 밝히고 있으므로, 가덕도에 본격적인 [[왜성 (건조물)|왜성]]이 완성 단계에 이르른 것은 바로 이 무렵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렇다면 가덕도왜성의 축성기간은 임시성에서 견고성으로 완성단계에 이르기까지 길어야 약 5개월 정도 소요된 것으로 생각된다.
 
[[1593년]] 3월부터 재개된 임진왜란 강화교섭은 그 후 [[1594년]]과 [[1595년]]에도 계속적으로 진행되었는데, 교섭단계에 [[명나라]]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군대의 조선 주둔에 불만을 표하였으며, 철수하지 않는다면 강화에 임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하였다. 이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군대는 1차로 [[명나라]]가 히데요시의 군에 대해 [[왜성 (건조물)|성곽]]을 파괴하고 철수할 것을 요구하자 [[고니시 유키나가]]는 [[1595년]] 4월에 허가를 받아 6월에 조선에 주둔 중이던 히데요시의 군대에 명령을 내렸다. 철수는 3단계로 계획된 것이었는데, 제1차는 거제도의 제 성, [[구포왜성]] 등 부산포 서쪽을 중심으로 약 10개성이었으며, 제2차는 부산포의 동쪽 [[기장죽성리왜성]], [[임량포왜성임랑포왜성]], [[서생포왜성]] 등의 3개성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3차 계획은 부산포, 김해의 [[죽도왜성]], [[안골왜성]], [[가덕도왜성]] 등의 4개성이었다.
 
이 3차 철수 계획은 동년말까지 철수를 완료한다는 계획이었으며, 그 절차는 먼저 단성에서 본성으로 철수한 뒤 부산포에서 최종적으로 철수한다는 계획이었다. 제2차 철수단계에서 [[가토 기요마사]]가 병력의 일부를 이끌고 [[기장죽성리왜성]]에 들어가 개수하는 등, 성곽을 강화한 사실이 [[명나라]]에게 알려지면서 항의가 발생하였다. 이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가토 기요마사에게 귀환을 명령하였으며, [[1596년]] 5월에 가토 기요마사는 [[기장죽성리왜성]]을 불태우고 귀환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리고 실제 제3차 철수는 실시되지 않았다. 3단계의 파괴 계획중에서 마지막 단계로 설정된 가덕도왜성은 여타의 3성과 마찬가지로 파괴는 물론 철수도 않았으며, [[1595년]]경에는 다치바나 가문이, [[1596년]]부터 [[시마즈 이에히사]]가 각각 주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