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요이 시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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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역사}}
'''야요이 시대'''({{llang|ja|弥生時代}}
[[조몬 시대]]에
야요이 시대에는 특히 수도경작(水稻耕作)가 도입되어 곡물의 비축이 가능해지면서 잉여작물의 생산과 축적이 발달하여, 이것이 부(富)에 연결되어 가지는 것과 가지지 못하는 것, 더 나아가서 빈부의 차와 상하관계가 생겨났다. 또한 대규모 관개 시설을 사용한다 벼농사 기술의 도입에 의해 개간과 농업용수의 대규모의 노동력이 필요하게 되어 집단의 대형화가 진행되었다. 대형화된 집단 사이에서는 부와 경작지, 수리권(水利権) 등을 둘러싸고 싸움이 발생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싸움을 통한 집단의 통합, 상하관계가 진전된 결과 각지의 조그만 나라가 생기고, 1세기 중반에 [[한위노국왕의 금인]](漢委奴國王印)을 [[후한]]으로부터 하사받고, 3세기 중엽에 [[야마타이코쿠]]의 여왕 [[히미코]]가 [[위 (삼국)|
== 명칭 ==
[[파일:YayoiJar.JPG|
《야요이》라는 명칭은 [[1884년]] 발견지인 [[도쿄|도쿄 시]] [[분쿄 구]] [[야요이 초]]의 [[패총]]에서 발견된 토기에 연유해 [[야요이식 토기]]로 부른 것에서 유래한다. (그 후 도시화의 진행으로 정확한 발견지를 확인할 수 없게 되었다.) 처음엔 야요이식 토기를 사용한 시대라는 의미에서 〈야요이식 시대〉라고 부르고, 그 후 ‘식’을 생략하는 호칭이 일반화되었다. 야요이 시대라는 명칭의 기원이 된 야요이에서 출토된 토기들이 현재의 [[토기편년]] 상에서 [[고훈 시대|고훈시대]] 전기에 해당한다는 설이 유력시되고 있다.
== 농경==
수도경작은 기원전 1200년경부터
[[이타즈케]]에서 시작한 벼농사와 한민족으로 부터 전수받은 청동기를 특징으로 한 야요이 문화는 세토 내해를 통해 동쪽으로 전해졌는데, 현재 [[후쿠오카]]와 [[가라쓰]], [[요시노가리]], 그리고 세토 내해의 [[오카야마]], 킨기 지방의 [[나라 분지]]에 전해졌으며 이를 바탕으로 [[쿠니]]들이 세워졌다. 수도경작은 [[기원전 2세기]] 이후에는 [[주부 지방]]에 보급되었고, [[1세기]] 전까지 [[간토]]와 [[도호쿠]] 남부에 전파되었다. 최종적으로 [[3세기]]까지 도호쿠 북부까지 벼농사가 전파됨으로써 홋카이도를 제외한 고대 일본은 3세기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농경 생활이 행해지기 시작한다.<ref name="구태훈"/> {{Rp|18~19}}
농경문화와 더불어 직물의 기술도 전해졌다. 이것이 일본열도에 전해진 것은 주로 한반도 남부로부터 집단적으로 이주해 온 사람들에 의해서였다고 생각된다. 이것은 한반도 남부의 것과 같은 형의 고인돌이 북큐슈에서 자주 발견되고, 서일본의 야요이시대 전기의 고인돌에서 발견되는 인골의 평균신장이 죠몬시대 인골의 그것과 비교해 볼 때 한반도 남부인의 신장에 가깝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ref>{{서적 인용 | 저자 = 연민수 |제목= 일본역사 |출판사=보고사 |연도=1998 |쪽=23 |id =
== 석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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