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제국 헌법: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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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Kenpohapu-chikanobu.jpg|섬네일|250px|1889년(메이지 22년) 헌법반포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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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 발포의 칙어에서 "불마(불멸)의 대전"(不磨ノ大典)이라고 명시했기 때문인지 일본국 헌법으로 개정될 때까지 한번도 수정이나 개정된 일은 없었다. 또한 [[청나라]]의 [[흠정헌법대강]]에도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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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년]]에는 [[태정관]]을 대신해 [[일본 내각|내각]] 제도가 창설되어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일본의 총리|내각총리대신]]으로 취임했다. 이후에도 헌법 제정은 조금씩 진척되었으며, 독일인 법률 고문 [[헤르만 뢰슬러]]의 조언을 통해 [[1887년]]에 헌법 초안이 완성되었다. 이 초안을 바탕으로 이토와 이노우에, [[이토 미요지]], [[가네코 겐타로]] 등은 나쓰시마(夏島, 지금의 [[가나가와현]] [[요코스카 시]])에 있는 이토 히로부미의 별장에서 헌법안을 검토했다. 이토는 천황의 자문 기관으로 [[추밀원 (일본)|추밀원]]을 설치하고, 의장이 되어 헌법 초안의 심의를 진행했다. [[1889년]] 1월에 심의는 완료되었다.
[[1889년]] [[2월 11일]] ‘'''
== 제정 이후의 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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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국 헌법의 제정 ==
[[1945년]], [[태평양 전쟁]]에서 패망한 일본은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여 종전을 맞이했다. 이어 [[더글러스 맥아더]]를 사령관으로 하는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이에 기초하여 '''일본안'''(3월 2일안)이 작성되었다. 그 후 일본안을 기초로 하여 '''헌법개정초안요강'''(3월 6일안)이 국민에게 공표되었다. [[4월 10일]]에는 [[제2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가 시행되었고, 선거가 끝나자 정부는 [[4월 17일]]에 요강을 법문화한 '''헌법개정초안'''을 공표하였다. 이어 [[4월 22일]]부터 추밀원의 헌법 개정안 심사가 시작되어 [[6월 8일]]에 통과되었으며, [[6월 20일]]에 정부는
== 구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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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장 천황'''
** 제1조
** 제2조 황위는 황실전범이 규정하는 바에 따라 황남자손이 이를 계승한다.
** 제3조 천황은 신성하여 침해하여서는 아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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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요 내용 ==
[[파일:Politics Under Constitution of meiji-korean.png|섬네일|500px|
일본제국 헌법은 [[입헌주의]]의 요소와 [[고쿠타이|국체]]의 요소를 함께 가지는 [[흠정헌법]]으로, 입헌주의에 의한 의회제도가 규정되어 있지만, 국체에 의해 의회의 권한은 제한되었다. 헌법 개정 이후, 헌법학자들은 이를 외견적 입헌주의, [[왕권신수설]]적이라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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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자료집|일본제국 헌법|일본 제국 헌법}}
* [http://www.7t7l.pe.kr/772
* [http://www.asahi-net.or.jp/~xx8f-ishr/kenpou_gikai.htm 이토 히로부미 저 『헌법의해』(憲法義解)의
* [http://contents.archives.go.kr/next/content/listSubjectDescription.do?id=005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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