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 3세: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잔글 →‎top: 정리. using AWB
47번째 줄:
[[파일:The Four Napoleons.jpg|섬네일|왼쪽|240px|4명의 나폴레옹. 우측 하단이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나폴레옹 3세)]]
 
샤를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나폴레옹 1세]]의 동생이자 1806~1810년에 [[네덜란드]] 왕을 지낸 [[루이 보나파르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나폴레옹 1세의 의붓딸인 [[오르탕스 드 보아르네]]였다.
 
~
 
루이 나폴레옹은 어린시절과 청년기를 주로 망명지에서 보냈다. 1815년 의붓 할아버지인 [[나폴레옹 1세]]가 몰락하자 어머니 오르탕스도 보나파르트 가문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프랑스에서 추방되었고, [[스위스]]에 자리잡아 1817년 [[아레넨베르크 성]](城)을 사들였다. 낭만적인 성격을 가진 그는 어린 루이 나폴레옹에게 나폴레옹 1세의 천재성을 열렬히 찬양하며 잃어버린 조국에 대한 열망을 심어주었다.
줄 67 ⟶ 69:
1848년 그는 [[프랑스 2월 혁명|2월 혁명]]이 터졌다는 소식을 듣고 [[파리시]]로 달려갔으나 임시정부는 그를 쫓아냈다. 그러나 지지자 몇 명은 소규모의 [[보나파르트 당]]을 조직해 그를 제헌의회 의원 후보로 지명했다. 6월 4일 4개 주(州)에서 당선되었으나 좀 더 상황이 안정되기를 기다리며 이 자리를 사양했다. 9월에 다시 출마해 5개 주에서 당선되었고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대통령 출마 준비에 들어갔다. 루이는 새로 창당된 [[질서당]](Parti de l'ordre)의 지원을 받았는데 [[부르봉 왕가]], [[루이 필리프]], [[로마 가톨릭]] 교회의 지지자들로 구성된 [[우파]] [[정당]]이었다. 이들은 마땅한 후보가 없었던 탓에 노련한 정치가는 아니었으나, 대중에게 인기있던 루이를 쓸 만한 인물로 판단하고 그를 지지하였다.
 
그는 제헌의회 의원 선거 때와 같은 대대적인 선전을 벌였다. 옛 황제의 조카라는 혈통과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으로 유권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프랑스의 영광스런 추억이 서려 있는 나폴레옹의 전설적인 위업을 환기시키며 평화로웠던 옛 시절을 되찾을 것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또한 각 계층의 국민들에게 그들의 이익을 모두 보호해주겠다고 약속하여 모든 유권자 집단의 지지를 얻었다. 중간계급과 농민들에게는 '질서'와 '번영'을, 빈곤층에 대해서는 '지원'을 약속했다. 1848년 12월 선거에서 모두 543만 4,226표를 얻었다. 루라독재체제 확립
 
=== 독재체제 확립 ===
대통령이 된 루이 나폴레옹은 1849년 5월 입법의회 선거에서 승리했던 질서당 소속에서 벗어나기로 결심했다. 그가 집권한 새 정부는 원정군을 파견해 [[교황청]]이 로마를 되찾도록 도왔다. 한편 프랑스 안에서는 활발한 정치활동을 벌이고 있던 공화파들을 정부요직에서 몰아내고 그들의 활동을 제약했다. 그러나 국민의회에서 루이가 믿고 의지할 수 있었던 의원들은 고작 12명 정도의 보나파르트 당원들뿐이었다. 그는 헌법이 보장한 권한을 충분히 활용해 조심스럽게 자신의 미약한 세력을 굳게 만들고, [[행정부]]와 군의 요직에 자신의 추종자들을 앉혔다. 10월 31일 처음으로 그는 국민의회보다는 그에게 더 충성을 바치는 사람들로 내각을 구성할 수 있었고, 전국을 돌며 국민들로부터 대대적인 환호를 받았다. 또한 그는 1850년 국민의회가 300만 명에 이르는 빈곤층 유권자들의 선거권을 박탈하고 1851년 경제 상태가 나빠지자, 이를 구실로 정당들에 대한 국민의 분노를 부추겼고, 있지도 않은 혁명의 위협에 대처할 수 있는 '강력한 인물'이 바로 자신이라는 점을 내세워 선전함으로써 독재체제를 확립했다.
=== 쿠데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