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세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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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 = 송악의 성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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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세조 왕륭'''(高麗 世祖 王隆, ? ~ [[897년]] [[5월]]?)은 [[후삼국시대]] [[후고구려]]의 군인이자 정치인이다. [[고려]]의 [[추존왕]]이며 [[고려 태조|태조 왕건]]의 아버지다. [[개성]] 송악산 [[남쪽]] 기슭에서 살았는데 [[송악]]의 [[호족]]이었다가 [[892년]] [[궁예]]가 [[군왕]]을 자칭하고 거병하자 송악군의 [[사찬 (관직)|사찬]](沙湌)으로서 군졸을 이끌고 그의 휘하에 들어갔고, 금성태수(金城太守)를 역임하였다. 초명은 용건(龍建)이고, 자는 문명(文明), 묘호는 [[세조]](世祖)이고, 시호는 위무대왕(威武大王)이다.
 
[[1027년]](현종(顯宗) 18)에 원열(元烈)의 시호가 추가되고 [[1253년]](고종(高宗) 40)에 또 가하여 민혜(敏惠)라 하여 원렬민혜위무대왕(元烈敏惠威武大王)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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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6년]] [[궁예]]가 [[양길]]을 정복하고 서북의 패권을 차지하자 그에게 귀복하여 금성태수에 임명되었다. 이때 궁예에게 “대왕께서 만일 [[조선]]·[[숙신]]·[[변한]] 땅의 왕이 되고자 하신다면 송악에 발어참성(勃禦塹城)을 쌓고, 먼저 신의 아들 [[왕건]]을 성주로 삼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라고 건의하자 [[궁예]]가 그의 말을 따라 [[왕건]]을 송악 성주로 임명하였다.
 
[[897년]] 5월 금성군에서 죽으니 영안성 강변의 석굴에 장사지냈다. 후일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자 '''세조위무대왕'''(世祖威武大王)으로 추존하고, 무덤을 [[창릉 (고려)|창릉]](昌陵)이라 하였다. [[고려 현종|현종]] 때인 1027년(현종 18년) 원열(元烈)의 시호가 더해지고, 1253년([[고려 고종|고종]] 40년) 민혜(敏惠)의 시호가 추가되었다.
 
== 가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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