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도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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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인 (토론 | 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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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여론이 들끓는 가운데 검찰은 선고결과에 대해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했고 장면 정부의 조재천 법무장관은 "법원이 4.19를 훼손한 원흉들에게 너무 엄밀한 증거주의의 잣대를 들이댄다.향후 이들의 처벌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 특별법 제정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특별법 제정은 집권당인 민주당의 내분때문에 차일피일 미뤄졌고 무죄 선고자에 대한 검찰의 항소도 불구속상태의 재판이라 쉽게 항소심이 열리지 않고 질질 끌던 상태에서 어느날 갑자기 [[5·16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군사정권의 혁명재판에 의해 신도환은 [[사형]]을 구형받았으나 무기징역을 선고받은후 총 8년3개월의 옥살이 끝에 특별감형되어 풀려난다.
출소후 한동안 신도환은 별로 하는 일 없이 시간을 보내게 된다. 교도소에 있는 동안 가장이 없는 집안은 기울대로 기울어져 어머님이 유일하게 유산으로 남겨준 대구시 남일동의 9백평 집이 다 분할되어 팔려나가 2백평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별다른 수입원도 없어 집에 쌀과 연탄이 떨어지고 딸들이 학교갈 차비가 없어 곤란을 겪는 상황인데도 특별히 오라는데도 갈 곳도 없이 무기력한 날들의 연속이었다.서울에 있기가 괴로워서 고향에 내려가면 뭔가 일거리가 있을까 하여 대구에 내려가 몇개월을 있었으나 거기서도 특별히 할 일
이 있지는 않았다.무슨 사업을 하려해도 경험도 자신도 없어 쉽게 엄두가 나지않았다. 결국 다시 서울에 올라와 구 자유당 동료의원 출신들과 어울려 바둑과 낚시 등으로 소일하게 된다.그러던 중 박정희 정권이 3선개헌을 위해 무리수를 두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당시 제일야당 신민당은 각계각층에 당의 문호를 개방하였는데 이때 신도환을 포함한 구 자유당계 전직의원 약40명이 신민당에 입당하게 되는데 이들의 대표격이던 전 국회부의장 이재학(강원도 홍천, 2ᆞ3ᆞ4ᆞ5대 국회의원,사사오입 개헌 제안자)은 신민당 당수 유진산에게 자신들 몫으로 당 정무위원1석을 요구하였고 유진산이 응락하자 그
자리에 신도환을 추천하였다.그러나 유진산은 마지막에 가서 약속을 지키지 않고 신도환 몫이었던 정무위원에 최용근 의원을 임명하였다.이에 신도환은 배신감을 느끼고 한밤중에 유진산 댁으로 찾아가 유진산에게 극언을 퍼부으며 항의하였으나 오히려 유진산이 의연한 모습으로 사과한 뒤 그 불가피한 사정을 차분히 설명하고 자신에게 "시장할 테니 식사라도 하고 가라"며 굳이 사양하는데도 억지로 밥상을 차려주는 지극정성에 서운한 감정이 봄눈 녹듯 사라지고 오히려 진산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그는 평소 잘 몰랐던 진산이지만 그때부터 인간적인 친숙함을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