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종 (고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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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종은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실현하고자 하는 야심이 강한 인물이었다.<ref name="kwak23">곽준식, 《마케팅 리더십》 (도서출판 살림, 2005) 23페이지</ref> 그리하여 그는 중앙군을 능가하는 군사력을 가진 호족의 제거를 계획.<ref name="kwak23"/> 하였다. 즉위 초기에는 호족들의 지지가 필요하였기에 호족들에게 권한을 부여했다. 그러나 태자 시절 호족들이 자기 가문의 연고가 있는 태자를 위에 올리기 위해 암투를 벌이는 것을 지켜본 그는 호족들의 숙청을 결심한다. 광종은 [[고려 왕조]] 성립 초기의 공신들과 호족들의 세력을 약화시켜 왕권의 강화와 중앙집권적 국가체제 확립, 국가의 재정 기반 안정을 위한 과감한 개혁 정책을 추진하였다. 즉위한 후, 광종은 국초에 왕실을 위해 공을 세운 공역자를 정해 차등을 두어 쌀을 지급하였는데, 이는 자신의 지지세력을 확고히 다지기 위함이었다.
 
광종은 기존의 [[중국]]의 [[연호]]를 받아다 쓰던 관례를 폐지하고 [[949년]]에 [[광덕]](光德)이라는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여 자주의식을 표현하였다. 그러나 [[951년]]에 [[후주]](後周)의 연호를 사용하면서 후주와의 외교 관계를 돈독히 하였다. 그리고 국가의 주체성을 살리기 위해 [[연호]]를 다시 정하여 “준풍”“[[준풍]]”(峻豊)이라 하였다가(960년~963년), [[963년]] [[송나라]]와 국교를 연 후에는 [[송나라]]의 [[연호]]인 “[[건덕]]”(乾德)을 사용하였다(963년~968년).
 
==== 민심안정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