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오다이: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Down Side (토론 | 기여)
Ohmstr(토론)의 22797763판 편집을 되돌림
Ohmstr (토론 | 기여)
Down Side(토론)의 22799079판 편집을 되돌림 - 국장, 수상, 보대 라는 용어가 국가원수, 총리, 바오다이에 우선한다는 근거를 제시하시기 바랍니다.
23번째 줄:
|총리 =
 
|작위2 = [[베트남국]] [[남베트남의 지도자|국장국가원수]]
|재위2 = 1949년 6월 13일-1955년 10월 26일
|대관식2 =
|즉위식2 =
|전임자2 = [[응우옌반쑤언]] ([[베트남 임시중앙정부|임시정부 수상총리]])
|후임자2 = [[응오딘지엠]]
|섭정2 =
36번째 줄:
|휘 = 응우옌푹티엔
|별호 = 응우옌푹빈투이
|연호 = [[바오다이 (연호)|보대바오다이]](保大)
|묘호 =
|존호 =
58번째 줄:
|종교 = [[개신교]] → [[천주교]]
}}
'''바오다이'''({{vie|v=Hoàng đế Bảo Đại}}, 保大, [[1913년]] [[10월 22일]] ~ [[1997년]] [[7월 31일]])는 [[베트남]] [[응우옌 왕조]]의 마지막 제13대 [[황제]](재위: [[1925년]] [[11월 13일]](정식 즉위는 [[1926년]] [[1월 8일]]) ~ [[1945년]] [[3월 11일]])이자 [[베트남 제국]]의 황제(재위: [[1945년]] [[3월 11일]] ~ [[1945년]] [[8월 23일]])이고 [[베트남국]]([[베트남 공화국]])의 [[국장]]국가원수(재임: [[1949년]] [[6월 13일]] ~ [[1955년]] [[4월 30일]])이다. 재위기간 중 [[프랑스]]와 [[일본]]의 식민통치 하에서 형식적으로 제위를 유지하였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바오다이는 다시 베트남에서 패권의 발톱을 드러내던 프랑스의 지원으로 남베트남의 [[베트남국]]의 국가 원수(元首)가 되었으며, 1949년 프랑스와 조약을 맺고 통치권을 인정받지만, 1955년 미국의 지원을 받은 총리 [[응오딘지엠]]이 국민투표를 통해 왕정을 폐지하자 프랑스로 망명했다.<ref name="han01">[http://news.hankooki.com/ArticleView/ArticleView.php?url=life/200307/h2003073016443825340.htm&ver=v002 <nowiki>[</nowiki>오늘속으로<866>(7월31일)<nowiki>]</nowiki>바오다이] 한국일보 2003/07/30</ref> [[휘]]는 '''응우옌푹티엔'''({{vie|v=Nguyễn Phúc Thiển}}), [[자 (이름)|자]]는 '''응우옌푹빈투이'''({{vie|v=Nguyễn Phúc Vĩnh Thụy}})이다.
77번째 줄:
그러나 [[일본 제국|일제]]의 패망으로 그 직후에 베트남에서는 8월 혁명으로 [[1945년]] [[8월 23일]]에 베트남 제정이 붕괴되어 바오다이는 보위에서 퇴위하였고, [[호찌민]](Hồ Chí Minh)이 [[베트남]] [[과도 정부]] 총리로 임시 수반 체제를 성립하였으며 같은 해 [[9월 2일]] [[호찌민]]이 [[베트남 민주 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하여 국가원수로 본격 취임하였고 같은 해 [[10월 2일]] [[호찌민]]이 [[베트남 민주 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전격 취임하자 바오다이는 사실상 완전히 퇴진하였다. 바오다이는 [[호찌민]]에 의해서 [[베트남 민주 공화국]] 정부의 최고 고문에 임명되었지만, 공식 외교 대표단의 일원으로서 방중시에 망명 하여, [[1946년]] 당시에 [[영국]]의 식민지인 [[홍콩]]에 망명했다.
 
베트남에서는 [[1946년]]에 [[프랑스]]와 [[베트남 민주 공화국]]의 사이에 제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발발했지만, 바오다이는 [[1949년]]에 [[베트남]]에 귀국하여, 프랑스의 지원에 의해 남베트남의 코친차이나 공화국을 흡수하여 수립된 베트남국([[베트남 공화국]])의 국가원수(국가주석)가 되었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강화 협정으로서 [[1954년]]에 [[제네바 협정 (1954년)|제네바 협정]]이 성립하면서, 베트남국은 국제적인 승인을 얻었다. 바오다이는 [[1954년]]에 [[응오딘지엠]]({{vie|v=Ngô Ðình Diệm|hn=吳廷琰}})을 수상으로총리로 임명했지만, 향락을 추구하는 방탕한 생활을 계속하므로 민심이 이반하여 1954년 국민투표에서 총리 응오딘지엠에게 향하였다. 그는 자신의 사촌동생 [[바오로크]]를 총리로 임명하여 민심을 수습하려 했지만 실패하고 만다. [[응오딘지엠]]은 [[1955년]]에 [[베트남 공화국]]의 정치체제에 대해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그 결과, [[응오딘지엠]]은 승리하여, [[베트남 공화국]]을 대통령제로 이행시켜, 국가주석제를 폐지하고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바오다이는 국가원수(국가주석) 직위로부터 퇴임하여 프랑스의 [[파리 (프랑스)|파리]]에 망명했지만, 베트남으로 귀국하지 않고 [[칸 (프랑스)|칸]] 부근에서 여생을 보냈다. [[1997년]] [[7월 31일]]에 파리의 육군 병원에서 사망했다.
134번째 줄:
|후임자 = [[응오딘지엠]]
|대수 = 1
|직책 = [[베트남국]]의 국장국가원수
|임기 = [[1949년]] ~ [[1955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