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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위기무안후열전·한서에 따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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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2|위기후(魏其侯; 두영)는 오래 전부터 신분이 존귀했던 자로, 천하의 선비들이 원래부터 따랐었습니다. 지금 장군은 존귀해진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아직 위기후만은 못합니다. 그러하니 만약 황제께서 장군더러 승상이 되라고 하신다면, 반드시 위기후에게 양보하십시오. 위기후가 승상이 되면 장군은 반드시 태위가 되실 것입니다. 태위는 승상과 똑같이 고귀하며, 또 장군은 양보할 줄 아는 분이라는 명성을 얻을 것입니다.}}
이에 전분은 태후에게 귀띔을 하였고, 결국 두영과 전분은 각각 승상 · 태위가 되었다.
두영과 전분은 유학을 좋아하여, 유학자 [[조관 (전한)|조관]]을 [[사공 (관직)|어사대부]]에, [[왕장 (낭중령)|왕장]]을 [[광록훈|낭중령]]에 임명하였다. 또 [[노군|노나라]]의 [[신배|신공]]을 초빙하여 명당(明堂)을 설치하고 관소를 폐지하여 유학의 예를 따라 복식 제도를 갖추고 [[열후]]를 봉국으로 내보내려 하였다. 이듬해 조관이 황태후에게는 아뢰지 말 것을 권하니, 노한 두패후는 조관·왕장을 내쫓고 전분·두영을 파면시켰다.
얼마 후 전분은 온몸이 아파지는 병에 걸렸는데, 무제가 무당을 시켜 알아보니 무당은 두영과 관부가 전분을 매질하여 죽이려는 것이라고 아뢰었다. 머지않아 전분 또한 죽었고, 작위는 아들 [[전염 (전한)|전염]]이 이었다.
==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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