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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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는 원래 육부(六部) 연맹에서, 출발 근처의 작은 부족 연맹을 병합·정복하여 국세가 점점 강성하여져서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한반도 남부를 통합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지방 관제도 그 국세의 확장에 따라서 확대·발전되어 갔다.
 
그리하여 [[지증왕]] 때는 주군(州郡) 제도가 처음 생겼고, 영토의 비약적 발전을 보게 된 법흥·진흥왕 때에는 그 지방관제가 확립된 듯하다. 신라의 지방 행정조직은 군사조직과 밀접한 관계를 가져 중요한 곳은 주(州)로 삼았다. 주에는 군주(軍主)를 두어 그 영역의 군정을 맡아서 이를 통치하게 하였다. 군주 밑에는 여러 성주가 있었다. 또 《[[양서 (역사서)|양서]]》신라전에 따르면, 신라가 동해 남단에 편재(偏在)할 당초에는 경주 부근에 6부(六部)<ref group="주해">육탁평(六啄評)</ref> 가 있었고, 기외(畿外)에는 52읍륵(邑勒)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다가 영토가 확대됨에 따라 차차 주현 제도가 확립되어 갔다. 한편 중요한 곳, 즉 아시촌(阿尸村)<ref group="주해">지금의 경남 함안</ref> 과 국원(國原)<ref group="주해">지금의 충주</ref> 에는 소경(小京)을 두고, 지방장관인 사신(仕臣)을 파견하여 다스렸다.
 
=== 남북국 시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