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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의 흥망 ===
[[파일:Baekje Diadem King 2.jpg|섬네일|250px|왼쪽|백제의 왕관 장식(무령왕)]]
[[4세기]] [[근초고왕]]은 남으로 [[마한]] 지역을 완전히 제압하고 [[탐라]]를 복속시켰다. 북으로는 [[고구려]]의 침공을 막고, 북진하여 오히려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 그리고 해외로 눈을 돌려 랴오시, 산둥, 큐슈 등으로 진출해 무역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송서]], [[
그러나 [[5세기]] 이후 고구려의 [[고구려 장수왕|장수왕]]에 적극적인 남하 정책에 밀려 결국 개로왕이 전사까지 하게 된다. 결국 백제는 한강 유역의 수도 한성을 빼앗기고 금강변의 [[웅진]]으로 수도(475년)를 옮기면서 대외 팽창이 위축되었다. 더구나 중국과 일본 지역의 정세 변화에 따라 무역 활동도 침체되어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왕권이 약화되고 귀족 세력이 국정을 주도하였으며, 문주왕 때는 해구와 같은 무인 실권자가 등장하여 백제의 사정은 더욱 어려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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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와 사상 ===
《[[주서]]》(周書)는 백제에 대해 “절과 탑이 매우 많다(寺塔甚多).”고 기록하고 있다.<ref>{{서적 인용 |제목= [[주서]] | 저자= 영호덕 등 |연도= 636 |장= [[:zh:s:周書/卷49#百濟|주서 권49 백제]] |인용문= 僧尼寺塔甚多,而無道士。}}</ref> 백제의 불교가 융성했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다.<ref>{{서적 인용 |제목= 이야기 한국고대사(고조선에서 발해까지, 우리 역사를 찾아서) | 저자= 조법종 |연도= 2007 |출판사=청아출판사 |쪽= 200 |id={{ISBN|978-89-368-0359-9}} |인용문= 중국사서 《주서》는 백제의 역사에 대해 “절과 탑이 매우 많다(寺塔甚多).”고 기록하고 있다. 백제의 불교가 융성했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다.}}</ref> 불교는 384년([[침류왕]] 1) 서역의 승려인 [[마라난타]]에 의해 [[동진]]에서 전래된 것이 기록상 최초로 나타난다. 침류왕은 마라난타를 궁궐에 머물게 하면서 <ref name="ReferenceA">{{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연도= 1145 |장= [[:s:삼국사기/권24/침류왕|본기 권24 침류왕]] |인용문= 秋七月 遣使入晉朝貢 九月 胡僧摩羅難陁自晉至 王迎之致宮內 禮敬焉 佛法始於此 (가을 7월에 사신을 진(晉)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9월에 호승(胡僧) 마라난타(摩羅難陁)가 진나라에서 왔다. 왕이 그를 맞이하여 궁궐 안으로 모셔 예우하고 공경하니, 불교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ref> 이듬해에는 사원을 지어 승려 10명을 거처하게 했다.<ref>{{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연도= 1145 |장= [[:s:삼국사기/권24/침류왕|본기 권24 침류왕]] |인용문= 二年 春二月 創佛寺於漢山 度僧十人 冬十一月 王薨 (2년(385) 봄 2월에 한산(漢山)에 절을 세우고 열 사람이 승려가 되는 것을 허가하였다[度僧]. 겨울 11월에 왕이 죽었다. )}}</ref> 백제의 [[불교]]는 이 때부터 시작된다고 여겨진다. 불교는 전래 초기부터 국가적인 차원에서 숭상·장려되었고, 국가적인 차원에서 사찰을 건립한 경우도 많았다. 577년(위덕왕)에 착공해<ref>《[[삼국사기]]》에는 [[600년]](법왕 2년) 봄 정월에 법왕이 왕흥사를 창건하고, 30명이 승려가 되는 것을 허가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연도= 1145 |장= [[:s:삼국사기/권27/법왕|본기 권27 법왕]] |인용문= 二年 春正月 創王興寺 度僧三十人 ... (2년(600) 봄 정월에 왕흥사(王興寺)를 창건하였고, 30명이 승려가 되는 것을 허가하였다[度僧].... )}}) 그러나 [[2007년]] [[10월 10일]] 왕흥사지 터에서 발견된 사리함 몸통에 한자 '丁酉年二月 十五日百濟 王昌爲亡王 子爲刹本舍 利二枚葬時 神化爲三'(정유년 2월15일 백제왕 [[백제 위덕왕|창]](昌)이 죽은 왕자를 위해 절을 세우고 본래 사리 두 매를 묻었을 때 신의 조화로 셋이 되었다)라는 글이 음각되어 있는 것이 밝혀져, 실제 창건 연도가 삼국사기 기록보다 23년 앞선 것으로 확인되었다.</ref> 634년(무왕 35)에 완성된 [[왕흥사]](王興寺)는 호국사찰로 유명하다. 599년(법왕 1)에는 불교적 사상에 따라 생물을 죽이지 못하게 하는 국왕의 명이 있었으며, 민간에서 기르는 매를 놓아주며, 어로와 사냥도구들을 불태운 적도 있었다.<ref>{{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연도= 1145 |장= [[:s:삼국사기/권27/법왕|본기 권27 법왕]] |인용문= 法王 ... 冬十二月 下令禁殺生 收民家所養鷹鷂放之 漁獵之具焚之 (법왕(法王)은 ... 겨울 12월에 명령을 내려 살생을 금지하고 민가에서 기르는 매와 새매를 거두어 놓아주게 하였으며, 고기 잡고 사냥하는 도구들을 태워버리게 하였다. )}}</ref> 백제불교는 계율의 연구가 활발했으며 [[겸익]]이 대표적인 [[계율종]] 승려였다. 한편 [[백제금동대향로]]로 미루어 보아 도가사상과 신선사상이 발달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산경문전이나 [[사택지적비]]에도 도교사상의 영향이 발견된다. 또 백제는 낙랑·대방의 한인과 접하면서 일찍부터 한문과 유교를 접했다. 그리하여 [[4세기]] 중엽 근초고왕대에 역사서인 〈[[서기 (역사서)|서기]]〉가 편찬되기도 했고, 오경박사를 둘 정도로 유교도 국가적 차원에서 장려했다.
=== 건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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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서 경략설 ====
백제가 중국의 [[랴오시|랴오시 지방]]을 점령하고 진평군과 진평현에 통치기관을 설치하고 4세기부터 6세기 초 혹은 중엽까지 대략 200년간 지배했다는 설이다.<ref>출처: 한국사강좌 - 1. 고대편, 이기백. 이기동</ref> 이러한 학설은《[[송서]]》, 《[[
일반적으로는 백제의 요서진출에 대해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학계의 시각이 대세이지만<ref>유원재, 〈"백제 략유(略有)요서" 기사의 분석〉, 《백제사의 이해》, 학연문화사, 1991</ref>, 최근에는 다시 백제의 요서 진출을 신중하게 실재한 것으로 바라보는 입장도 제기되고 있다.<ref name=autogenerated1>강종훈, 〈4세기 백제의 遼西 지역 진출과 그 배경〉, 《한국고대사연구》30, 한국고대사학회, 2003</ref>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편찬하는 《국사》교과서에는 1990년 이전까지 백제가 요서를 공격했다고 서술하고 있으나 1990년 이후부터 진출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모호하게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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