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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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의 흥망 ===
[[파일:Baekje Diadem King 2.jpg|섬네일|250px|왼쪽|백제의 왕관 장식(무령왕)]]
[[4세기]] [[근초고왕]]은 남으로 [[마한]] 지역을 완전히 제압하고 [[탐라]]를 복속시켰다. 북으로는 [[고구려]]의 침공을 막고, 북진하여 오히려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 그리고 해외로 눈을 돌려 랴오시, 산둥, 큐슈 등으로 진출해 무역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송서]], [[양서 (역사서)|양서]] 등의 남조 계열의 기록에 따르면, 광개토왕이 [[랴오둥]] 일대를 점령한 시기(397년 이후)에 백제가 [[요서|랴오시]] 지역을 획득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시기의 백제는 광개토왕의 공격을 받아 58개 성을 빼앗기는 등 어려운 상황에 있어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5세기]] 이후 고구려의 [[고구려 장수왕|장수왕]]에 적극적인 남하 정책에 밀려 결국 개로왕이 전사까지 하게 된다. 결국 백제는 한강 유역의 수도 한성을 빼앗기고 금강변의 [[웅진]]으로 수도(475년)를 옮기면서 대외 팽창이 위축되었다. 더구나 중국과 일본 지역의 정세 변화에 따라 무역 활동도 침체되어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왕권이 약화되고 귀족 세력이 국정을 주도하였으며, 문주왕 때는 해구와 같은 무인 실권자가 등장하여 백제의 사정은 더욱 어려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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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와 사상 ===
《[[주서]]》(周書)는 백제에 대해 “절과 탑이 매우 많다(寺塔甚多).”고 기록하고 있다.<ref>{{서적 인용 |제목= [[주서]] | 저자= 영호덕 등 |연도= 636 |장= [[:zh:s:周書/卷49#百濟|주서 권49 백제]] |인용문= 僧尼寺塔甚多,而無道士。}}</ref> 백제의 불교가 융성했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다.<ref>{{서적 인용 |제목= 이야기 한국고대사(고조선에서 발해까지, 우리 역사를 찾아서) | 저자= 조법종 |연도= 2007 |출판사=청아출판사 |쪽= 200 |id={{ISBN|978-89-368-0359-9}} |인용문= 중국사서 《주서》는 백제의 역사에 대해 “절과 탑이 매우 많다(寺塔甚多).”고 기록하고 있다. 백제의 불교가 융성했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다.}}</ref> 불교는 384년([[침류왕]] 1) 서역의 승려인 [[마라난타]]에 의해 [[동진]]에서 전래된 것이 기록상 최초로 나타난다. 침류왕은 마라난타를 궁궐에 머물게 하면서 <ref name="ReferenceA">{{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연도= 1145 |장= [[:s:삼국사기/권24/침류왕|본기 권24 침류왕]] |인용문= 秋七月 遣使入晉朝貢 九月 胡僧摩羅難陁自晉至 王迎之致宮內 禮敬焉 佛法始於此 (가을 7월에 사신을 진(晉)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9월에 호승(胡僧) 마라난타(摩羅難陁)가 진나라에서 왔다. 왕이 그를 맞이하여 궁궐 안으로 모셔 예우하고 공경하니, 불교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ref> 이듬해에는 사원을 지어 승려 10명을 거처하게 했다.<ref>{{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연도= 1145 |장= [[:s:삼국사기/권24/침류왕|본기 권24 침류왕]] |인용문= 二年 春二月 創佛寺於漢山 度僧十人 冬十一月 王薨 (2년(385) 봄 2월에 한산(漢山)에 절을 세우고 열 사람이 승려가 되는 것을 허가하였다[度僧]. 겨울 11월에 왕이 죽었다. )}}</ref> 백제의 [[불교]]는 이 때부터 시작된다고 여겨진다. 불교는 전래 초기부터 국가적인 차원에서 숭상·장려되었고, 국가적인 차원에서 사찰을 건립한 경우도 많았다. 577년(위덕왕)에 착공해<ref>《[[삼국사기]]》에는 [[600년]](법왕 2년) 봄 정월에 법왕이 왕흥사를 창건하고, 30명이 승려가 되는 것을 허가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연도= 1145 |장= [[:s:삼국사기/권27/법왕|본기 권27 법왕]] |인용문= 二年 春正月 創王興寺 度僧三十人 ... (2년(600) 봄 정월에 왕흥사(王興寺)를 창건하였고, 30명이 승려가 되는 것을 허가하였다[度僧].... )}}) 그러나 [[2007년]] [[10월 10일]] 왕흥사지 터에서 발견된 사리함 몸통에 한자 '丁酉年二月 十五日百濟 王昌爲亡王 子爲刹本舍 利二枚葬時 神化爲三'(정유년 2월15일 백제왕 [[백제 위덕왕|창]](昌)이 죽은 왕자를 위해 절을 세우고 본래 사리 두 매를 묻었을 때 신의 조화로 셋이 되었다)라는 글이 음각되어 있는 것이 밝혀져, 실제 창건 연도가 삼국사기 기록보다 23년 앞선 것으로 확인되었다.</ref> 634년(무왕 35)에 완성된 [[왕흥사]](王興寺)는 호국사찰로 유명하다. 599년(법왕 1)에는 불교적 사상에 따라 생물을 죽이지 못하게 하는 국왕의 명이 있었으며, 민간에서 기르는 매를 놓아주며, 어로와 사냥도구들을 불태운 적도 있었다.<ref>{{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연도= 1145 |장= [[:s:삼국사기/권27/법왕|본기 권27 법왕]] |인용문= 法王 ... 冬十二月 下令禁殺生 收民家所養鷹鷂放之 漁獵之具焚之 (법왕(法王)은 ... 겨울 12월에 명령을 내려 살생을 금지하고 민가에서 기르는 매와 새매를 거두어 놓아주게 하였으며, 고기 잡고 사냥하는 도구들을 태워버리게 하였다. )}}</ref> 백제불교는 계율의 연구가 활발했으며 [[겸익]]이 대표적인 [[계율종]] 승려였다. 한편 [[백제금동대향로]]로 미루어 보아 도가사상과 신선사상이 발달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산경문전이나 [[사택지적비]]에도 도교사상의 영향이 발견된다. 또 백제는 낙랑·대방의 한인과 접하면서 일찍부터 한문과 유교를 접했다. 그리하여 [[4세기]] 중엽 근초고왕대에 역사서인 〈[[서기 (역사서)|서기]]〉가 편찬되기도 했고, 오경박사를 둘 정도로 유교도 국가적 차원에서 장려했다.
 
=== 건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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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서 경략설 ====
백제가 중국의 [[랴오시|랴오시 지방]]을 점령하고 진평군과 진평현에 통치기관을 설치하고 4세기부터 6세기 초 혹은 중엽까지 대략 200년간 지배했다는 설이다.<ref>출처: 한국사강좌 - 1. 고대편, 이기백. 이기동</ref> 이러한 학설은《[[송서]]》, 《[[양서 (역사서)|양서]]》 등의 남조계 사서에 기록된 백제의 요서 지방 점령 기록에서 비롯한 것이다. 다만 지리적으로 랴오시 지방과 인접한 북조계 사서에서는 관련 기록이 나타나지 않아 학계에서 지속적인 논란이 되어왔다.
 
일반적으로는 백제의 요서진출에 대해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학계의 시각이 대세이지만<ref>유원재, 〈"백제 략유(略有)요서" 기사의 분석〉, 《백제사의 이해》, 학연문화사, 1991</ref>, 최근에는 다시 백제의 요서 진출을 신중하게 실재한 것으로 바라보는 입장도 제기되고 있다.<ref name=autogenerated1>강종훈, 〈4세기 백제의 遼西 지역 진출과 그 배경〉, 《한국고대사연구》30, 한국고대사학회, 2003</ref>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편찬하는 《국사》교과서에는 1990년 이전까지 백제가 요서를 공격했다고 서술하고 있으나 1990년 이후부터 진출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모호하게 표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