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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
청의 황제는 선양(당시의 봉천)에 제사를 지내러 가는 것이었지만, 황제의 행차는 청더에 머물렀다. 청더는 계절과 날씨가 좋고, 자연이 수려하며, 풍경이 아름답다. 또 온천 등도 있었기 때문에 [[강희제]]는 1703년 2개의 별궁을 짓기로 결정한다. [[옹정제]]를 거쳐 1741년 [[건륭제]] 때 대규모 정비가 이루어져, 준공으로부터 87년이 지난 1790년에 완성하고, 외팔묘를 궁 밖에 짓기 시작한다. 이곳은 청나라 전기의 황제의 여름 집무지로, 정치, 군사, 외교 등의 국가대사에 중요한 역할을 한 곳이다. 이런 이유로 베이징(당시의 연경) 이외의 제2의 정치중심으로 불렸다.
 
=== 강희제 ===
[[강희제]]는 매년 입추 이후 목란위장을 찾아 20여일에 걸쳐 사냥을 했으며 피서산장으로 돌아와 쉬었다. 산장 정궁의 오문에 걸려있는 '피서산장'이라는 현판은 강희제가 직접 쓴 것이다. 그는 피서산장에서 북방의 소수민족들과 잦은 만남을 가지며 우호관계를 유지하였다. 열하행궁과 그 주변에 있는 사당에서는 소수민족의 종교적 의식을 거행하였다. 피서산장은 그가 유약하지 않도록 사냥을 함으로 문과 무의 균형을 유지하는 장소였다.
 
=== 건륭제 ===
1793년 영국 사절단이 피서산장에 있던 건륭제를 만나기 위하여 도착하였다. 영국 사절단은 텐진과 닝보 그리고 저우산 등을 개항할 것과 광저우 부근의 일부 토지를 거류지로 할양해 줄 것을 요구했으나 건륭제는 모두 거절하였다.
 
1860년 [[제2차 아편 전쟁]] 때 영-프 연합군이 베이징에 난입하여 황제는 이곳으로 피난을 오기도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