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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Kita Ikki.jpg|섬네일|기타 잇키]]
'''키타기타 잇키'''({{llang|ja|{{ruby-ja|北|きた}} {{ruby-ja|一輝|いっき}}}}, [[1883년]] [[4월 3일]] ~ [[1937년]] [[8월 19일]]) 는 [[일본]]의 사상가, 사회운동가, 국가사회주의자, 파시스트이다. 본명은 '''키타기타 테루지로데루지로'''({{llang|ja|{{ruby-ja|北|きた}} {{ruby-ja|輝次郎|てるじろう}}}})이다.
 
[[천황제]]와 [[메이지 헌법]], 천황주권론에 대한 혹독한 비판자였다. 키타는기타는 "천황의 국민"을 "국민의 천황"으로 만들고자 했으며, [[국가주의]], [[우파사회주의]]적 접근법으로 일본을 개조하려 했다. 키타에게는기타에게는 천황 역시 자신의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천황이 [[현인신]]이라는 사고가 팽배했던 [[일본 제국]]에서 그런 키타는기타는 매우 특이한 이질분자였다. [[천황제 파시즘]]이 진짜 [[파시즘]]인지 여부에 논란이 있는 일본에서 키타는기타는 매우 드문 정통 서양식 [[파시스트]]였으며 혁명적 낭만주의자였다.
 
[[1936년]] [[2월 26일]] [[2.26 사건]]에 관여했다는 죄목으로 처형당했다.
 
== 일생 ==
키타기타 테루지로는데루지로는 메이지 16년(1883년) 4월 3일, [[니가타현]] [[사도군]] 료츠미나토정(현 [[사도시]] 료즈미나토)의 양조업자 키타기타 케이타로(北 慶太郎)와 그 처 리쿠(リク)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친 케이타로는 초대 료츠정장을 지낸 인물이었으며, 테루지로의데루지로의 2살 아래 동생은 [[중의원 의원]]을 지낸 [[키타기타 네이키치]]다. 또 4살 위의 누나와 4살 아래의 남동생이 있었다.
 
메이지 30년(1897년), 그 전해에 설립된 구제사도중학교(신제 [[사도 고등학교]])에 1학년으로 입학, 이듬해인 1898년 바로 3학년으로 진급한다. 메이지 32년(1899년) 눈병에 걸려 제국대학병원에 입원, 여름 무렵까지 도쿄에 머물렀다. 메이지 33년(1900년) 눈병으로 인한 학업부진으로 5학년 진급에 실패하고, 부친의 가업이 기울어 퇴학했다. 이 눈병 때문에 오른쪽 눈은 [[의안]]이었다.
 
메이지 34년(1901년) 니가타 안과병원에 7개월간 입원했다. 이 때 상경했을 때 [[고토쿠 슈스이]]와 [[사카이 토시히코]]의 [[평민사]] 운동에 관심을 갖고 [[사회주의]] 사상을 접하게 되었다. 메이지 36년(1903년) 부친이 사망하고, 같은 해 10월 키치로(輝次郎)로 개명했다. [[모리 시루이쿠]]가 창간한 『사도신문』 지상에 [[러일전쟁|러일개전론]], [[국체론]] 비판 등 논문을 발표, 국가와 제국주의에 부정적이었던 고토쿠와는 차별화된, 국가를 전제로 하는 사회주의를 구상하게 된다. 키타는기타는 일본 제국이라는 국가에서 국민과 [[천황]]의 관계에 주목하여, 『국민 대 천황의 역사적 관찰』에서 “천황은 국민에 가까운 가족 같은 존재다”라고 주장했다가 이틀 만에 연재 중단을 당했다. 동생 레이키치가 [[와세다 대학]]에 입학하자 그것을 쫓듯이 상경, 같은 대학 정치경제학부에 입학했다. [[아리가 나가오]], [[호즈미 야츠카]] 등의 학자들의 강의를 청강하고 도서관에서 [[사회과학]] 관련 책을 탐독하며 독학으로 연구를 진행했다.
 
메이지 39년(1906년) 처녀작 『[[국체론 및 순정사회주의]]』를 간행했다. [[일본 제국 헌법|대일본제국 헌법]]의 [[천황제]]를 비판한 이 책은 발간하자마자 5일만에 판금 처분이 되었고 키타는기타는 요주의 인물로 여겨져 경찰의 사찰대상이 되었다. 키타의기타의 “순정사회주의” 이념은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일반이론을 목표로 한 것이었는데, 그 중 가장 주력한 것이 “통속적 국체론의 파괴”였다. 책이 판금되자 키타는기타는 [[미야자키 토텐]] 등 [[혁명평론사]] 동인들과 만나 교류하게 되었고, [[중국혁명동맹회]]에 입당하여 [[신해혁명|중국 혁명]]에 투신한다.
 
메이지 44년(1911년) 마부치 야스와 알게 된다. 동년 10월, [[송교인]]의 전보를 받고 [[흑룡회]] 『시사월함』지 특파원 신분으로 [[상하이|상해]]에 가서 송교인에게 몸을 의탁했다. 1913년(다이쇼 2년, 민국 2년) 3월 22일, 송교인이 상해 북정거장에서 암살되었다. 그 범인이 [[쑨원|손중산]]이라는 기사가 신문에 발표되었기 때문에 4월 상해 총영사 [[아리요시 아키라]]에게 3년 퇴청 명령을 받고 귀국한다. 이 때의 경험은 『[[지나혁명외사]]』로 정리, 간행된다. 이 책에서 키타는기타는 [[제1차 세계대전]] 와중 일본이 중국에 [[21개조 요구]]를 한 것을 비판하고 있다.
 
다이쇼 5년(1916년), 마부치 야스에게 입적되고 다시 중국에 건너가 상해 북쪽 사천로의 일본인 병원에 취직한다. 이 때부터 중국풍 이름인 잇키(一輝)를 자칭했다. 1919년(다이쇼 8년, 민국 8년), 병원에 출입하던 [[시미즈 코노스케]], [[이와타 후미오]]에게서 일화상애회(日華相愛会)의 자문을 요청받았다. 1920년(민국 9년) 8월, 상해를 방문한 [[오카와 슈메이]], [[미츠카와 카메타로]]에게 귀국을 요청받고 12월 31일 시미즈와 함께 귀국했다.
 
다이쇼 10년(1921년) 1월 4일부터 [[유존사]]의 핵심 존재가 되어 국가개조운동에 관여하게 된다. 다이쇼 12년(1923년) 유존사가 해산당했다. 키타는기타는 『[[일본개조법안대강]]』을 일부 복자로 발간하여, 의회를 통한 개조에 한계가 있으니 군사혁명, 즉 [[쿠데타]]에 의한 개조를 주장했다. 이것은 [[2·26 사건]]의 주모자인 청년장교 [[무라나카 타카지]], [[이소베 아사이치]], [[쿠리하라 야스히데]], [[나카하시 모토아키]]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또한 동 문건에서 사유재산, 사유토지에 제한을 두어 자본의 집중을 방지하고, [[화족]] 같은 특권계급이 천황과 국민을 가로막는 울타리라고 지적, 그 철거를 주장했다.
 
다이쇼 15년(1926년), [[야스다 공제생명회사 내분사건]]이 일어났다. 키타의기타의 앞잡이였던 시미즈 코노스케가 피로 물든 옷을 입고 야스다 생명에 나타나 회사를 위협했다. 같은 해 키타는기타는 15은행이 재산을 사리사욕에 남용, 경영이 난맥을 당하고 있다고 공격하는 [[찌라시]]를 제작해 각 방면에 뿌렸다. 키타의기타의 영향하에 있는 군인, 우익의 테러를 우려한 [[자이바쓰|재벌]]들은 키타에게기타에게 정보료 명목으로 뇌물을 보냈다. 이 자금으로 키타는기타는 “당당한 저택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보내고, 처자 3인 외에 하녀 3명, 자동차 운전수 1명 등을 먹여살렸다. 같은 해 [[궁내성 괴문서사건]]으로 체포되었다가 이듬해인 쇼와 2년(1927년) 석방되었다.
 
쇼와 11년(1936년) [[2·26 사건]]으로 체포. 쇼와 12년(1937년) 8월 14일, 민간인임에도 불구하고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사형을 선고받는다. 5일 후인 8월 19일, [[니시다 미츠기]]와 함께 [[총살형]]에 처해졌다. [[사세구]]는 “[[쇼와 천황|도련님]]에게 [[일본군|투구]]를 빼앗겨 져 버린 싸움(若殿に兜取られて負け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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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상 ==
키타의기타의 첫 정치 논고는 1906년에 발간한 1,000쪽 분량의 『[[국체론 및 순정사회주의]]』다.<ref name=Koschmann>{{서적 인용|이탤릭체=예|last1=Koschmann|first1=J. Victor|title=Authority and the Individual in Japan|date=1978|publisher=University of Tokyo Press}}</ref> 여기서 키타는기타는 [[국체론]]을 비판하고, 일본의 사회주의가 타협을 열망하여 퇴락할 가능성을 우려한다. 하지만 키타는기타는 [[마르크스주의]]에는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으며, 외세의 영향은 일본과 양립할 수 없다는 [[국민주의]]적 견지에서 사회주의를 주장했다.<ref name=Koschmann /> 그 결과 키타의기타의 사상은 마르크스주의 같은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와는 공통점이 없게 되었다. [[할 드레이퍼]]는 이것을 “위로부터의 사회주의”라고 대조했다.<ref name="draper">{{서적 인용|이탤릭체=예|
| title = The Two Souls of Socialism: socialism from below v. socialism from above
| last = Dr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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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clc = 9434175
| location = New York
}}</ref> 이 책에서 키타는기타는 마르크스주의와 [[계급투쟁]]을 비판하고, 대신 [[사회진화론]]을 강조한다. 키타는기타는 국민주의적 사회주의의 “위로부터” 개념과 [[유교]] 사이의 관련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플라톤주의]]적 권위주의 국가를 옹호한다. 그에 따르면 플라톤의 사회조직론이 마르크스의 그것보다 훨씬 좋은 것이며, [[맹자]]는 동방의 [[플라톤]]이었다. 한편, 두 번째 책 『지나혁명외사』는 신해혁명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책이다.
 
키타의기타의 일본 정치에 관한 구상은 『사도신문』에서 일하던 1903년-1906년 끄적인 여러 글들에서부터 이미 나타나는데, 1919년 작성하여 1923년 발간한 『[[일본개조법안대강]]』에서 그 내용이 일단 집대성된다. 전기에나 후기에나 키타의기타의 정치철학에서 일관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고쿠타이|국체]]에 대한 개념이다. 키타는기타는 단일한 강력한 지도자에 의한 [[전체주의]] 정권을 도입하고자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쿠데타]]는 불가피했다. 그리고 천황이 일본 사회에서 누리는 특수한 지위에 착안하여, 키타는기타는 천황을 “강력한 지도자”의 역할을 맡을 존재로 낙점했다. 천황의 권위를 이용해 [[메이지 헌법]]을 중지시키고 [[일본 국회|국회]]를 급진적으로 재조직한다. 개조된 국회는 전략산업들을 [[국유화]]하고, 사유재산에 제한을 가하며 [[토지개혁]]을 실시해 농민들의 이익을 보장한다. 그리고 이런 개혁을 통해 강력해진 일본이 서방 [[제국주의]]로부터 [[아시아]]를 해방시켜야 한다는 것이 키타의기타의 정견이었다.<ref>James L. McClain, ''Japan: A Modern History'' p 438 {{ISBN|0-393-04156-5}}</ref> 이것을 소위 [[쇼와 유신]]이라고 한다.<ref>James L. McClain, ''Japan: A Modern History'' p 437 {{ISBN|0-393-04156-5}}</ref>
 
그런 한편 키타는기타는 『국체론 및 순정사회주의』에서부터 [[호즈미 야츠카]] 같은 인종주의적 극우는 배격했다. 호즈미류는 일본이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신화시대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동질했던 단일민족국가라고 주장했다. 반면 키타는기타는 메이지 시대에 합병된 지역들의 중국인, 조선인, 러시아인들과 일본인 시민들이 모두 조화하여, 인종에 상관없는 다 같은 제국의 시민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비일본인들에게도 일본인과 동일한 권리와 의무가 주어져야 한다. 키타가기타가 보기에 비일본인 인구를 포용하지 않고서는 일본 제국의 팽창은 불가능했다.<ref>Walter Skya, ''Japan's Holy War: the Ideology of Radical Shinto Ultranationalism'' pp.123–125 {{ISBN|978-0822344230}}</ref>
 
== 평가 ==
이렇게 인종주의, 사회주의, 국가주의, 민주주의, 자유주의, 심지어 일련종의 종교적 색채까지 뒤섞여 있기 때문에 키타의기타의 사상은 이해하기 어려운 편이다. 키타의기타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한 [[2·26 사건|2·26 청년장교]]들 역시 키타의기타의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키타에게기타에게 천황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이상을 구현하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으나, [[황도파]] 청년장교들은 진심으로 천황에게 충성했다. 함께 총살된 니시다 미즈키가 총살되기 전에 “천황폐하 만세” 삼창을 하자고 제안하자 키타는기타는 거부했는데,<ref>http://www.page.sannet.ne.jp/mahekawa/kabutotorarete.htm</ref> 상술한 사세구 역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다 키요테루]]는 이런 키타기타 사상을 “홈런성 대형 파울볼”이라 평했다.
 
[[반노 준지]]는 당대 일본에서 오로지 키타만이기타만이 [[반천황제]]에 기반한 [[사회민주주의]]를 주창했다고 평가했다. 반노는 [[이타가키 다이스케]]나 [[나카에 조민]] 같은 [[자유민권운동|자유민권운동가]]들도 천황제를 용인했고, [[천황기관설]]을 주장한 [[미노베 다쓰키치]]나 [[요시노 사쿠조]]에 비해도 키타기타 쪽이 훨씬 인민주의자에 가깝다고 평했다.<ref>{{Harvtxt|坂野|田原|2006|pp=190-193}}</ref>
 
== 참고 자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