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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34년(1901년) 니가타 안과병원에 7개월간 입원했다. 이 때 상경했을 때 [[고토쿠 슈스이]]와 [[사카이 토시히코]]의 [[평민사]] 운동에 관심을 갖고 [[사회주의]] 사상을 접하게 되었다. 메이지 36년(1903년) 부친이 사망하고, 같은 해 10월 키치로(輝次郎)로 개명했다. [[모리 시루이쿠]]가 창간한 『사도신문』 지상에 [[러일전쟁|러일개전론]], [[국체론]] 비판 등 논문을 발표, 국가와 제국주의에 부정적이었던 고토쿠와는 차별화된, 국가를 전제로 하는 사회주의를 구상하게 된다. 기타는 일본 제국이라는 국가에서 국민과 [[천황]]의 관계에 주목하여, 『국민 대 천황의 역사적 관찰』에서 “천황은 국민에 가까운 가족 같은 존재다”라고 주장했다가 이틀 만에 연재 중단을 당했다. 동생 레이키치가 [[와세다 대학]]에 입학하자 그것을 쫓듯이 상경, 같은 대학 정치경제학부에 입학했다. [[아리가 나가오]], [[호즈미 야츠카]] 등의 학자들의 강의를 청강하고 도서관에서 [[사회과학]] 관련 책을 탐독하며 독학으로 연구를 진행했다.
 
메이지 39년(1906년) 처녀작 『[[국체론 및 순정사회주의]]』를 간행했다. [[일본 제국 헌법|대일본제국 헌법]]의 [[천황제]]를 비판한 이 책은 발간하자마자 5일만에 판금 처분이 되었고 기타는 요주의 인물로 여겨져 경찰의 사찰대상이 되었다. 기타의 “순정사회주의” 이념은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일반이론을 목표로 한 것이었는데, 그 중 가장 주력한 것이 “통속적 국체론의 파괴”였다. 책이 판금되자 기타는 [[미야자키 토텐]] 등 [[혁명평론사]] 동인들과 만나 교류하게 되었고, [[중국혁명동맹회]]에 입당하여 [[신해혁명|중국 혁명]]에 투신한다.
 
메이지 44년(1911년) 마부치 야스와 알게 된다. 동년 10월, [[송교인]]의 전보를 받고 [[흑룡회]] 『시사월함』지 특파원 신분으로 [[상하이|상해]]에 가서 송교인에게 몸을 의탁했다. 1913년(다이쇼 2년, 민국 2년) 3월 22일, 송교인이 상해 북정거장에서 암살되었다. 그 범인이 [[쑨원|손중산]]이라는 기사가 신문에 발표되었기 때문에 4월 상해 총영사 [[아리요시 아키라]]에게 3년 퇴청 명령을 받고 귀국한다. 이 때의 경험은 『[[지나혁명외사]]』로 정리, 간행된다. 이 책에서 기타는 [[제1차 세계대전]] 와중 일본이 중국에 [[21개조 요구]]를 한 것을 비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