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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임'''(尹任, [[1487년]] ~ [[1545년]] [[8월 30일]]) [[조선]]시대 중기의 무신이자 인척. 자(字)는 성임(聖任<ref>同禍錄, 송희규, 야계선생문집 제3권</ref>), 임지(任之), 본관은 [[파평 윤씨|파평]]이다. 영[[돈녕부]]사 파원부원군(坡原府院君) [[윤여필]]의 아들이자 [[조선 중종|중종]]의 비인 [[장경왕후 (조선)|장경왕후]]의 오빠로, [[1506년]]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조선 중종|중종]]을 옹립하는데 기여하였다. 또한 그의 장남 윤흥인의 아들 윤호는 중종과 경빈 박씨의 딸 혜정옹주의 사위가 된다. [[1512년]](중종 7)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은 [[숭정대부]][[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판돈녕부사]]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이르렀다. 누이 [[장경왕후 (조선)|장경왕후]] 사후에 자신의 집안인 파평 윤씨에서 [[문정왕후 (조선)|문정왕후]]를 새 왕비로 추천하였는데, 이후 [[윤원형]] 일가와는 앙숙이 됐다. 이후 대윤(大尹)의 거두로 [[윤원형]], [[윤원로]] 등 소윤(小尹) 일파와 대립하였다.
 
윤임은 [[조선 인종|인종]]의 외삼촌이었고 [[윤원형]]은 [[조선 명종|명종]]의 외삼촌이었는데, 둘이 세력이 비등하여 서로 싸웠으며, 당시 사람들이 윤임을 대윤, 윤원형을 소윤이라 불렀다. [[조선 중종|중종]] 때부터 [[조선 명종|경원대군]]을 추대하려던 [[윤원형]], [[윤원로]] 등과 갈등하다가 [[1545년]] [[조선 인종|인종]]이 죽고 [[조선 명종|명종]]이 즉위한 뒤 [[윤원형]], [[이기 (1476년)|이기]] 일파의 탄핵을 받고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유배가던 중 그해 [[8월]] [[충청북도]] [[충주시|충주]]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1577년]](선조 10년) 신원되고, [[임진왜란]] 때 아들 [[윤흥신]]의 공로로 [[증직|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었다.
 
퇴계 [[이황]]은 중종, 명종조의 척신들의 정사 농단에 대해 그에게도 죄가 있다고 비판했고, 율곡 [[이이]]는 그에게는 죄가 없다고 평가하는 등 상반된 시각이 있다. 그의 정적이었던 [[윤원형]]은 그와는 9촌간으로, [[문정왕후 (조선)|문정왕후]]의 친정아버지 [[윤지임]]은 윤임의 8촌 종형이었다. [[중종 반정]] 공신인 [[박원종]]은 그의 외삼촌이었고, [[월산대군]]과 [[제안대군]]은 그의 이모부였다. 작위는 파은군(坡恩君)이고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경기도]] 출신.
 
== 생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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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5년]] [[8월]] [[이기 (1476년)|이기]] 등의 탄핵으로 유배령을 받고 남해로 유배가던 중 [[8월 28일]] 사사령(賜死令)이 떨어진다. [[8월 30일]] 배소로 가던 중 [[충청북도]] [[충주시|충주]]에서 사약을 받고 생을 마감한다. 이때 그의 나이 향년 58세였다. 당시 성인이던 그의 아들 흥인(興仁)·흥의(興義)·흥례(興禮) 등 3명도 함께 사형당하였다. 장남 [[윤흥인]]은 무과에 급제하여 정랑, 첨정을 지냈고, 윤흥의는 [[생원]]이었으며 윤흥례는 당시 [[선공감]]감역이었다.
 
그의 다른 누이는 [[계성군]]([[조선 성종|성종]]의 서자)의 양자가 된 [[계림군]]의 생모로, 이 인연으로 그가 [[계림군]]을 추대하려 했다는 무고를 당하기도 했다. 그의 아들들 중 [[윤흥신]]과, 나이 어린 서자들, 장남 [[윤흥신]]의 세 아들만은 유모와 하인들에 의해 화를 피할 수 있었다. 이때 기적적으로 피신한 아들들 중 [[윤흥신]]은 후에 [[임진왜란]] 당시 참전했다가 전사한다.
 
숙부 윤여해도 연좌되어 유배당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 윤여필은 80세 넘은 고령이고 [[장경왕후]]의 친정아버지라는 이유로 처벌은 면하였다. 또한 장남 윤흥인은 그와 같이 사형당했지만 [[조선 중종|중종]]과 [[경빈박씨]]의 딸 [[혜정옹주]]의 사위인 윤호 역시 옹주의 사위라는 이유로 화를 모면하였다.
 
이때 기적적으로 피신한 아들들 중 [[윤흥신]]은 후에 [[임진왜란]] 당시 참전했다가 전사한다.
 
[[을사사화]]와 [[조선 중종|중종]], [[조선 명종|명종]]조의 권신들의 권력농단에 대해 그에게도 책임이 있느냐 없느냐는 논란이 되었다. 퇴계 [[이황]](李滉)은 "사직(社稷)에 대한 죄가 없지 않다"며 역시 비판하였으나, [[이이]](李珥)는 "임은 죄가 없다"고 하여 평가가 엇갈리기도 했다. 바로 [[고양군]] 남면 항동 손좌건향의 언덕에 매장된 본부인 여흥이씨의 시신과 함께 합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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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변 인물 ==
* 그는 [[조선 성종]]의 형 [[월산대군]]과 이중으로 인척관계를 형성한 겹사돈이었다. 그의 누이 중 한명은 [[월산대군]]의 서자(庶子) 덕풍군에게 출가했는데, 그들의 아들이자 윤임의 외조카 중 한명이 [[계림군]] 유이다. 계림군은 아들없이 죽은 [[조선 성종|성종]]의 서자 [[계성군]]의 양자로 갔다.

* 함께 [[중종반정]]에 참여한 [[박원종]]은 사돈이자윤임의 외숙부가외삼촌이면서 사돈이 되는데, 이모인 월산대군 박씨의 남동생이며, 누이의 시외숙뻘이 된다. 박원종은 경빈 박씨가 수양딸이었지만 장경왕후와 윤임의 외삼촌이기도 했다.
 
* 외조카인 [[조선 인종|인종]]의 후궁이 [[숙빈 윤씨]]로 숙빈 윤씨는 [[문정왕후 (조선)|문정왕후]], [[윤원형]], [[윤원로]]의 조카이자 윤임에게는 10촌 종손녀뻘이 된다.
 
* 소윤 [[윤원형]]의 일파였던 [[윤안인]], [[윤춘년]]도 그의 종증조부 [[윤사흔]]의 증손과 4대손이었다. 이들은 윤원형에게는 7촌 아저씨와 8촌이 된다.
 
* [[김안로]]와 함께 동궁인 인종을 보호해야 된다고 주장했는데, [[김안로]]는 다시 [[윤원형]]의 장인 김안수의 사촌형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