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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후 ===
묘는 다른 곳에 매장했다가 복권 후 1590년(선조 23년) 윤임과 전부인 여흥이씨 묘를 이장하면서 윤임을 가운데 묻고 부인을 좌·우에 함께 묻었다. [[경기도]] [[고양군]] 남면 향동리(현, [[고양시]] [[덕양구]] [[향동동]] 239-7번지)에 있다. [[조선 선조|선조]] 즉위 후 [[1577년]](선조 10년)에 신원, 복관되었다. [[임진왜란]] 아들 [[윤흥신]]이 전사하면서 전공으로 [[증직|증]] [[병조]][[참의]]로 [[추증]]되면서, 그도 추은(推恩)으로 후에 다시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 관상감사에 특별 증직되었다.
 
[[1589년]](선조 22) 후처인 현풍곽씨가 아들 윤흥신의 임지인 [[서산군]]에서 사망하자 그해 [[8월]] 남면 향동의 오좌자향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가 [[1590년]](선조 23) [[10월]] 윤임과 전부인의 묘를 어머니 [[순천부부인 박씨]] 묘 아래로 천장하면서 그를 가운데에 묻고 부인은 좌우에 매장하였다. 그의 묘소 위에는 어머니 순천부부인 순천박씨의 묘소가 있고, 그의 묘소 아래에는 모친의 몸종의 묘가 있다.<ref name="news22">http://search.nate.com/search/all.html?sc=ak&afc=A190000001&q=</ref> 아들보다 오래 살았다는 어머니 순천 박씨 묘가 몸종 묘와 함께 있다. 평생을 수족같이 따랐던 정성이 지극하여 후손들이 특별히 몸종 사후 위 아래로 매장했다고 한다.<ref name="news22"/> 드문 묘제라 한다.<ref name="news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