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비디우스: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생애: 원어 병기 괄호 밖으로 뺌
8번째 줄:
당시의 많은 기사층 출신의 자녀들처럼 오비디우스는 일찍 [[로마]]로 유학하여 관리가 되기 위한 필수교육인 [[수사학]]과 [[웅변술]]을 배웠다. 법조계로 진출하는 것이 부친의 소망이었으나 본인은 법률 공부보다는 시작이나 화려한 사교를 즐겨, 법정변론을 하려 해도 "말이 저절로 시가 되었다"고 한다.
 
또한 문화의 중심지 [[아테네]]로 유학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로마로 돌아와 약간 관리 경력을 쌓지만 곧 이를 포기하고 시인이 되고자 마음을 굳힌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문인들을 후원하는 [[메살라 코르비누스]]에 발탁되어 당시의 유명 문인들과 교류를 갖게 된다. [[티불루스]] 등의 시인 서클에 가담, 당시 유행했던 엘레게이아풍의 연애시로 필재를 휘둘러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연애의 농락술을 교훈시풍으로 엮은 《사랑의 기술(Ars Amatoria)이 풍속을 문란케 하는 책이라 하여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노여움을 샀다.
 
그 후 연애시와는 결별하고 이야기시의 제작에 몰두, 필생의 대작 《[[변신이야기]](Metamorphoses)를 완성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 헌정하려던 《행사력(Fasti)<ref>한국어판(천병희 옮김, 숲, 2010)에서는 이 책의 제목을 《'''로마의 축제들'''》라고 번역했음.</ref>을 제작 중이던 서기 8년 황제로부터 돌연 로마 추방을 선고 받았는데 이 추방에 얽힌 경위는 지금까지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만년은 전반이 화려했던 것에 비해 비참했다. [[흑해]] 연안의 벽지 토미스에서 호소와 애원이 담긴 서신을 고국에 띄우며 10년을 보내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 각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