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오르기 말렌코프: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Metrobot (토론 | 기여)
잔글 위키데이터와 로컬이 같은 위키공용분류 링크 조정
태그: m 모바일 웹
51번째 줄:
[[1941년]] [[6월]] [[동부 전선 (제2차 세계 대전)|독소전쟁]]이 발발하자 국가 방위 위원회의 위원이 되었으며 각 전선의 전력 조직화에 진력을 다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후인 [[1946년]], 당 중앙위원회의 정치국 정국원으로 승진해 [[1947년]]에 각료회의 부의장이 되었다. 이후에는 정적이었던 [[안드레이 즈다노프]]와 [[라브렌티 베리야]]에 의해 쫓겨났지만, 즈다노프의 죽음으로 곧바로 스탈린의 심복으로 복귀하였다.
 
그는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하자 서기장 겸 공산당 필두 서기에 올라 [[소비에트 연방|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연방]]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그러나, 집단 지도 체제를 구상했던 말렌코프는 곧바로 공산당 필두 서기에 [[니키타 흐루쇼프]]를 임명하였다. 부수상 겸 내상이 된 베리야는 스탈린에 대한 비판을 전개했지만, 말렌코프와 흐루쇼프는 이 의견을 지지하지 않았으며 베리야는 체포돼 사형에 처해졌다.
 
말렌코프는 총리 자리에 있던 2년간 핵병기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또한, 세계적 긴장을 완화하기 위한 조치를 발표하면서 "평화 공세"에 착수했다. <ref>김진웅, 《냉전의 역사, 1945~1991》비봉출판사(1999) 81~82쪽. 그의 뒤를 이어 [[니키타 흐루쇼프]]가 제1서기가 되자 "평화"라는 단어는 더욱 힘을 얻게 되었다. </ref>이러한 서방 국가와의 관계 개선 방침은 보수파들의 반발로 지도자에서 물러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 정치국|소련 공산당 정치국]]에서는 유임하여 [[1957년]] [[6월]], [[니콜라이 불가닌]],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라자르 카가노비치]] 등의 반당 집단을 주도, [[니키타 흐루쇼프]]를 실각시키려고 했기 때문에 정치국에서 마저 사직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