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제3공화국: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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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 방위 정부 (Gouvernement de la Défense nationale) ====
 
<sup>상세 문서 : [[1870년 9월 4일 프랑스 공화국 선포]]와 [[국가 방위 정부]]</sup>
 
[[프로이센-프랑스 전쟁|보불전쟁]] 당시 군사작전들은 연이어 실패하고 심지어 [[스당 전투|1870년 9월 2일 스당]]에서 [[나폴레옹 3세]]가 포로가 되기에까지 이르렀다. 그 와중 폭동에 가담한 대중들에 의해 [[부르봉궁]] 침탈을 시작으로 입법부가 공격받고 마침내 9월 4일 [[레옹 강베타]]에 의해 [[파리 시청사|파리시청]]에서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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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년 1월 18일 독일 황제 [[빌헬름 1세]]는 최종적으로 [[베르사유궁]]에서 독일의 통일을 선언했다. 1월 23일부터 파리는 폭격과 위협과 기근의 고통을 겪었다. 외무부 장관 쥘 파브르는 독일과의 협상을 하기 위해 정부인사들과 함께 수도에 머물렀다. 휴전 협정은 포위된 지 132일이 지난 1월 28일이 되서야 체결되었다.
 
=== 1871년 2월 8일 선거와 평화 ===
<sup>본문 : [[국민 의회 (1871)]] 참조.</sup>
 
1871년 1월 29일 법령은 선거 방식을 정착시켰고, [[프랑스 제2공화국|제2공화국]]의 공화파 전통을 회복했으며, [[프랑스 제2제국|제2제정]]하의 법이었던 단기 2회제 투표와 반대되는 연기명 투표, 지방 투표, 과반수 투표방식의 1849년 3월 14일 제정되었던 선거법을 시행했다. 선거는 특수한 환경에서 진행되었는데 40개 도, 40만명의 프랑스인 죄수, 그리고 파리를 제외한 시골은 선거에 준비되지 않았다. 거기다 투표는 시골 보수지역 유권자들을 기권시키려는 목적으로 도의 중심지에서만 전개되었다.
 
법률의 제정이 아니라 전쟁 혹은 평화가 선거의 주요 쟁점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공화파들은 최후까지 적국 프로이센과의 전쟁을 지속하길 원하는 [[레옹 강베타]]를 비롯한 급진파, 평화를 원하던 중도파로 분열되었다. 왕당파부터 부르주아 자유주의자까지 다양한 자들로 구성된 보수파는 평화 추구를 목표로 단결했다.
 
1871년 2월 8일, 왕당파들이 새 국회의 다수를 차지했다 : 675명의 의석은 400명 정도의 왕당파 (182명의 [[정통왕당파|정통왕조파]]와 214명의 [[오를레앙파]]), 250명의 공화파, [[펠릭스 퓌아]] Félix Pyat와 [[베누아 말롱]] Benoît Malon같은 소수의 사회주의자들, 코르시카와 샤랑트에서 뽑힌 몇 명의 보나파르트파로 구성되었다.
 
침략받은 동부 지방은 중부 지방과 파리와 마찬가지로 공화파와 찬전주의가 주를 이뤘다. 전쟁에 지친 프랑스인들은 투표에서 왕당파 지지를 보인걸 제외하고는 평화 지지를 위해 투표하려 했다.
 
실제로, [[앙드레 앙크르베]]는 '왕당파의 대다수는, 어떤 면에 있어서, 1851년의 루이-나폴레옹과 같은 실수를 다시 저지르려고 한다, 즉 그들은 여론의 과도한 추세와 더불어 (보불전쟁같은) 시국에 나라를 혼란스럽게 하려고 하고 있다. 국회의원들은 그들이 평화를 약속했기 때문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왕당파에 대한 그들의 주된 의견은 프랑스 대중의 의견과 합일하지 않는다'고 저술했다.
 
1871년 2월 16일, 대혁명 후부터 혁명 바깥에 끊임없이 존재했던 왕당파의 지지를 받은 중도 공화파인 [[쥘 그레비]]는 국민 의회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 제3공화국의 탄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