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제3공화국: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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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제3공화국'''({{llang|fr|Troisième République française}})은 [[1870년]]부터 [[1940년]]까지 69년간 [[프랑스]]에서 존속한 가장 안정적이었던 공화정 체제이다. 또한 1789년 이후에이후 인정된체제 중 프랑스의 안정적인 첫 체제이기도 하다.
 
대혁명 이후로 프랑스는 80년간 세 차례의 입헌 군주정, 짧은 두 번의 공화정(각기 12년과 4년씩)과 두 번의 제정, 총 일곱 개의 정치 체제를 겪었다. 이러한 혼란은 1870년부터 1879년까지 9년간의 국회ー왕정 철폐와 제3공화국 헌법 제정을 위해 생긴ー의 지지부진함을9년간의 국회의 우유부단을 보여 설명해준다준다. 헌법 제정의 타협으로, 1875년 헌법은 의회양원제 양원제를의회를 확립했고, 공화파들은 [[프랑스 제2공화국]]의 선출된 대통령 [[나폴레옹 3세]]의 1851년의1851년 쿠데타를 떠올려떠올리며 국가 수장의 대의적 역할에 동의한다.
 
제3공화국은 [[필리프 노르]]가 말한 것처럼 '<nowiki/>''공화주의자들의 시대''<nowiki/>', 다시말하자면 말해 교육,교육과 정교분리, 동맹파업과 노조결성의 자유를 명시한 위대한 법들이 설명하는, 강력한 민주주의로 대표되는 시대에 설립되었다. 이 시대는 프랑스인의 삶이 '혁명이 없는 때에 살고 있는듯 정치에 열광적이던' 시대이기도 하다. 이것은 [[뱅상 뒤클레르]]가 '''정치국가같은정치국가로서의 프랑스 정신의 탄생''<nowiki/>' 이라고 정의한 것이다. 사회가대중들이 갈망한원하던 사회개혁의잇따른 연속들사회개혁들, 특히 피고용인을 위한 법률의 제정으로제정이 이 특징되는시대의 시대였다특징이였다.
 
더욱이 제3공화국은 프랑스 정치사에서 각기 12년과 4년밖에 지속되지 않은 제1공화국(1792~1804)과 제2공화국 (1848~1852)의 실패 후 공화정 체제를 장기적으로 자리잡게 하였다. [[보불전쟁]]의 패배로부터 건국된 제3공화국은 독일과의 대립이라는 맥락속에서 발전했다.
 
 
1940년 7월 10일, 독일의 [[프랑스 침공]]에 직면한 국회는 [[페텡]]에게의 권력 위임을 투표했다. 다음날 11일, 페텡은 그 스스로 '프랑스 국가원수' ([[비시 프랑스]])가 되었고, 실질적으로 제3공화국은 끝났다.
더욱이 제3공화국은 프랑스 정치사에서 각기 12년과 4년밖에 지속되지 않은 제1공화국(1792~1804)과 제2공화국 (1848~1852)의 실패실패를 반면교사 삼아 공화정 체제를 장기적으로 자리잡게 하였다했다. [[보불전쟁]]의 패배로부터패배로 건국된 제3공화국은 독일과의 대립이라는 맥락속에서 발전했다.
 
1940년 7월 10일, 독일의[[나치 독일]]의 [[프랑스 침공]]에 직면한으로 국회는 [[페텡]]에게의에게 권력권력을 위임을 투표했다위임했다. 다음날다음날인 11일,11일에 페텡은 그 스스로마침내 '프랑스'''''프랑스의 국가원수'''''<nowiki/>' ([[비시 프랑스]])가 되었고, 제3공화국은 실질적으로 제3공화국은막을 끝났다내린다.
 
== 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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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해에 일어난 [[코뮌]]주의자들의 자치적 [[사회주의]] 정권([[파리 코뮌]])을 진압하고 해군의 함정정비에 대한 계획을 세워 해군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 보불전쟁 종결과 그 여파 ====
===== 국가 방위 정부 (''(Gouvernement de la Défense nationale)'') =====
<sup>상세 문서 : [[1870년 9월 4일 프랑스 공화국 선포]]와 [[국가 방위 정부]]</s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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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p>본문 : [[국민 의회 (1871)]] 참조.</sup>
 
1871년 1월 29일 법령은 선거 방식을 정착시켰고, 제2공화국의 공화파 전통을 회복했으며, 제2제정하의 법이었던 단기 2회제 투표와 반대되는 연기명 투표, 지방 투표, 과반수 투표방식의 1849년 3월 14일 제정되었던 선거법을 시행했다. 선거는 특수한 환경에서 진행되었는데 40개 도, 40만명의 프랑스인 죄수, 그리고 파리를 제외한 시골은 선거에 준비되지 않았다. 거기다 투표는 시골 보수지역 유권자들을 기권시키려는 목적으로 도의 중심지에서만 전개되었다.{{프랑스의 역사}}
 
법률의 제정이 아니라 전쟁 혹은 평화가 선거의 주요 쟁점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공화파들은 최후까지 적국 프로이센과의 전쟁을 지속하길 원하는 레옹 강베타를 비롯한 급진파, 평화를 원하던 온건파로 분열되었다. 왕당파부터 부르주아 자유주의자까지 다양한 자들로 구성된 보수파는 평화 추구를 목표로 단결했다. 1871년 2월 8일, 왕당파들이 새 국회의 다수를 차지했다 : 675명의 의석은 400명 정도의 왕당파 (<sup>''182명의 정통왕조파와 214명의 오를레앙파로 구성''</sup>), 250명의 공화파, [[펠릭스 퓌아]] (Félix Pyat) 와 [[베누아 말롱]] (Benoît Malon) 같은 소수의 사회주의자들, 코르시카와 샤랑트에서 뽑힌 몇 명의 보나파르트파로 구성되었다. 침략받은 동부 지방은 중부 지방과 파리와 마찬가지로 공화파와 찬전주의가 주를 이뤘다. 전쟁에 지친 프랑스인들은 투표에서 왕당파 지지를 보인걸 제외하고는 평화 지지를 위해 투표하려 했다. 실제로 [[앙드레 앙크르베]]는 '왕당파의 대다수는, 어떤 면에 있어서, 1851년의 루이-나폴레옹과 같은 실수를 다시 저지르려고 한다, 즉 그들은 여론의 과도한 추세와 더불어 (보불전쟁같은) 시국에 나라를 혼란스럽게 하려고 하고 있다. 국회의원들은 그들이 평화를 약속했기 때문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왕당파에 대한 그들의 주된 의견은 프랑스 대중의 의견과 합일하지 않는다'고 저술했다.
 
1871년 2월 16일, 대혁명 후부터 혁명 바깥에 끊임없이 존재했던 왕당파의 지지를 받은 온건 공화파인 [[쥘 그레비]]는 [[국민 의회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전쟁에 대한 그레비의 적대감과 질서수호의 의지는 그를 대다수의 이상적인 후보로 만들었다. 1871년 2월 17일, [[루이 필리프 1세|루이-필립]] 시절의 내무부 장관이었던 [[아돌프 티에르]]는 거의 만장일치로 프랑스 공화국 행정수반 (''Chef du pouvoir Exécutif de la République française'') 으로 임명되었다. 티에르는 '그가 선택한 장관들의 도움을 바탕으로 국회 권력하의 그의 직권을 행사하는, 국가적 위기에 필요한 지도자'였다. 2월 19일 그는 중도 우파와 사법부 장관 (''Portefeuille de la Justice'') [[쥘 뒤포르]]가 수장인 온건 좌파 장관들로 구성된 정부를 조직했다. 2월 19일 자신의 계획하에 티에르는 '평화를 추구하고, 재조직하며, 신용을 높이고, 일자리를 소생시켜야 한다'고 국회에 역설한다.. 1871년 3월 10일 [[보르도의 약속]]으로 티에르와 국회는 행정수반은 헌법 개정을 국회에 미리 알리지 않고서는 진행하지 않는 대신 국민 필수품 제공과 독일과의 협상이라는 암묵의 거래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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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군의 공격으로 독일군이 밀리자 1944년 파리가 탈환되고 비시 정부는 붕괴되었고 [[뱅상 오리오]]에 의해 제4공화정이 일어섰다.
{{프랑스의 역사}}
 
== 프랑스 제3공화국의 역대 대통령 ==
[[프랑스의 대통령 목록]] 참고.{{갤러리|파일:Adolphe Thiers Nadar 2.JPG|[[아돌프 티에르]](1871~1873)|파일:Macmahon.jpg|[[파트리스 드 마크마옹]](1873~1879)|파일:Jules Grevy.jpg|[[쥘 그레비]](1879~1887)|파일:Marie Francois Sadi Carnot.jpg|[[사디 카르노]](1887~1894)|파일:The evolution of France under the third republic (1897) (14782527405).jpg|[[장 카지미르 페리에]](1894~1895)|파일:Felix Faure.jpg|[[펠릭스 포레]](1895~1899)|파일:Emile Loubet.jpg|[[에밀 루베]](1899~1906)|파일:Armand Fallières Paris.jpg|[[아르망 팔리에르]](1906~1913)|파일:Raymond Poincaré 1914.jpg|[[레몽 푸앵카레]](1913~1920)|파일:Paul Deschanel 01.jpg|[[폴 데샤넬]](1920)|파일:Alexandre Millerand 02.jpg|[[알렉상드르 밀랑]](1920~1924)|파일:Gaston Doumergue 1924 crop.jpg|[[가스통 두메르그]](1924~1931)|파일:Paul Doumer 1931.jpg|[[폴 두메르]](1931~1932)|파일:Albert Lebrun 1932 (2).jpg|[[알베르 르브륑]](1932~1940)|title=프랑스 제3공화국의 역대 대통령|width=130|height=140|lines=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