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제3공화국: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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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젠느]]의 군대는 [[메츠 포위]] 속에서 계속 저항했다. 파리 역시 9월 18일부터 포위당했다. 1870년 9월 30일에는 시민들의 입대 의지를 돋구고자 첫 대출 유예명령이 공표되었다. 10월 7일에는 강베타가 지방에서 군대를 재조직하기 위해 열기구를 타고 파리를 떠났다.
 
10월 30일 15만명에 달하는 메츠의 병력과 바젠느의 서두른 항복은 프랑스에 심각한 위기를 야기했다. [[투르]]의 정부 대표단이 '루와르 부대'의 편성을 하고있던 도중에 항복을 하고 만 것이다. 그리하여 [[프로이센]]은 [[보르도]]로 후퇴한 정부 대표단을 따르는, 훈련도 안되있고 무장 상태도 나쁜 새 사단에만 집중 할 수 있었다.{{프랑스의 역사}}
 
1871년 1월 18일 독일 황제 [[빌헬름 1세]]는 최종적으로 [[베르사유궁]]에서 독일의 통일을 선언했다. 1월 23일부터 파리는 폭격과 위협과 기근의 고통을 겪었다. 외무부 장관 쥘 파브르는 독일과의 협상을 하기 위해 정부인사들과 함께 수도에 머물렀다. 휴전 협정은 포위된 지 132일이 지난 1월 28일이 되서야 체결되었다.
 
===== 1871년 2월 8일 선거와 평화 =====
<sup>본문 : [[국민 의회 (1871)]] 참조.</sup>{{프랑스의 역사}}
 
1871년 1월 29일 법령은 선거 방식을 정착시켰고, 제2공화국의 공화파 전통을 회복했으며, 제2제정하의 법이었던 단기 2회제 투표와 반대되는 연기명 투표, 지방 투표, 과반수 투표방식의 1849년 3월 14일 제정되었던 선거법을 시행했다. 선거는 특수한 환경에서 진행되었는데 40개 도, 40만명의 프랑스인 죄수, 그리고 파리를 제외한 시골은 선거에 준비되지 않았다. 거기다 투표는 시골 보수지역 유권자들을 기권시키려는 목적으로 도의 중심지에서만 전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