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제3공화국: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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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혁명 이후로 프랑스는 80년간 세 차례의 입헌 군주정, 짧은 두 번의 공화정(각기 12년과 4년씩)과 두 번의 제정, 총 일곱 개의 정치 체제를 겪었다. 이러한 혼란은 1870년부터 1879년까지 왕정 철폐와 제3공화국 헌법 제정을 위해 생긴 9년간의 국회의 우유부단을 보여 준다. 헌법 제정의 타협으로, 1875년 헌법은 양원제 의회를 확립했고, 공화파들은 [[프랑스 제2공화국]]의 선출된 대통령 [[나폴레옹 3세]]의 1851년 쿠데타를 떠올리며 국가 수장의 대의적 역할에 동의한다.
 
제3공화국은 [[필리프 노르]]가 말한 것처럼 '''''공화주의자들의 시대''<nowiki/>''', 말하자면 교육과 정교분리, 동맹파업과 노조결성의 자유를 명시한 위대한 법들이 설명하는, 강력한 민주주의로 대표되는 시대에 설립되었다. 이 시대는 프랑스인의 삶이 '혁명이 없는 때에 살고 있는듯 정치에 열광적이던' 시대이기도 하다. 이것은 [[뱅상 뒤클레르]]가 '''''정치국가로서의 프랑스 정신의 탄생''<nowiki/>''' 이라고 정의한 것이다. 대중들이 원하던 잇따른 사회개혁들, 특히 피고용인을 위한 법률의 제정이 이 시대의 특징이였다.
 
더욱이 제3공화국은 프랑스 정치사에서 각기 12년과 4년밖에 지속되지 않은 제1공화국(1792~1804)과 제2공화국 (1848~1852)의 실패를 반면교사 삼아 공화정 체제를 장기적으로 자리잡게 했다. [[보불전쟁]]의 패배로 건국된 제3공화국은 독일과의 대립이라는 맥락속에서 발전했다.
 
 
더욱이 제3공화국은 프랑스 정치사에서 각기 12년과 4년밖에 지속되지 않은 제1공화국(1792~1804)과 제2공화국 (1848~1852)의 실패를 반면교사 삼아 공화정 체제를 장기적으로 자리잡게 했다. [[보불전쟁]]의 패배로 건국된 제3공화국은 독일과의 대립이라는 맥락속에서 발전했다.
 
1940년 7월 10일, [[나치 독일]]의 [[프랑스 침공]]으로 국회는 [[페텡]]에게 권력을 위임했다. 다음날인 11일에 페텡은 마침내 ''''''프랑스의 국가원수'''''<nowiki/>' ([[비시 프랑스]])가 되었고, 제3공화국은 실질적으로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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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센-프랑스 전쟁|보불전쟁]] 당시 군사작전들은 연이어 실패하고 심지어 [[스당 전투|1870년 9월 2일 스당]]에서 [[나폴레옹 3세]]가 포로가 되기에까지 이르렀다. 그 와중 폭동에 가담한 대중들에 의해 [[부르봉궁]] 침탈을 시작으로 입법부가 공격받고 마침내 9월 4일 [[레옹 강베타]]에 의해 [[파리 시청사|파리시청]]에서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파일:Battle-Mars-Le-Tour-large.jpg|섬네일|보불전쟁. [[마르스라투르 전투와 그라블로트 전투|마르스라투르 전투]].]][[국가 방위 정부]]는 부대집결을 목표로 임명되었던 수도 사령관, [[트로쉬 장군]]을 지도자로 내세우며 조직되었다. 다른 장관급 인사들로는 [[쥘 파브르]] (외무부 장관 겸 부통령), [[쥘 페리]] (정무차관), 레옹 강베타 (내무부 장관), [[에르네스트 피카르]] (재무부 장관), [[앙리 로슈포르]], [[쥘 시몽]] (교육부 및 문화예술부 장관), [[아돌프 르 플로]] (국방부 장관), [[마르탱 푸리숑]](해군부 및 식민지부 장관), [[아돌프 크레미외]] (법무부 장관) 이 있었으며 이들 대부분이 파리의 공화파 대표였다.
 
[[국가 방위 정부]]는 부대집결을 목표로 임명되었던 수도 사령관, [[트로쉬 장군]]을 지도자로 내세우며 조직되었다. 다른 장관급 인사들로는 [[쥘 파브르]] (외무부 장관 겸 부통령), [[쥘 페리]] (정무차관), 레옹 강베타 (내무부 장관), [[에르네스트 피카르]] (재무부 장관), [[앙리 로슈포르]], [[쥘 시몽]] (교육부 및 문화예술부 장관), [[아돌프 르 플로]] (국방부 장관), [[마르탱 푸리숑]](해군부 및 식민지부 장관), [[아돌프 크레미외]] (법무부 장관) 이 있었으며 이들 대부분이 파리의 공화파 대표였다.
 
[[바젠느]]의 군대는 [[메츠 포위]] 속에서 계속 저항했다. 파리 역시 9월 18일부터 포위당했다. 1870년 9월 30일에는 시민들의 입대 의지를 돋구고자 첫 대출 유예명령이 공표되었다. 10월 7일에는 강베타가 지방에서 군대를 재조직하기 위해 열기구를 타고 파리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