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조 (조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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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부터 매우 영특하여 3세 때 〈효경〉을 읽고, 〈소학〉의 예를 실천했다. 8세 때는 직접 친필로 [[동몽선습]] 등의 내용을 그대로 따라 베끼기도 했다. 또한 일찍이 높은 정치적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ref name="daum1">[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18j3350a 장헌세자 - Daum 백과사전<!-- 봇이 따온 제목 -->]</ref> 10세 때 [[참봉]] [[홍봉한]]의 딸 홍씨를 간택하여 혼인하였다. 딸이 세자와 가례를 올린 뒤 [[홍봉한]]은 과거에 급제하고, [[홍봉한]]은 과거 급제 후 10년도 안돼 종2품으로 승진하여 [[광주]][[부윤]]이 되는 등의 출세가도를 달렸다.
 
부왕 [[조선 영조|영조]]는 자신이 무수리의 자식이라 갖게 된 한이 있어 아들 사도세자에게서는 무수리의 자식스러운 모습을 결코 보기 싫어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어렸을때부터 부왕 영조로부터 소학과 학문에만 열중하는게 세자의 도리라고 해서 소학과 학문에만 열중하였다. 그러다가 이상궁과 한상궁이 칼과 칼집을 가지고 와 전쟁놀이도 하였다. 나이 어린 세자가 노는 것은 문제가 없었지만 사도세자는 자기 어머니인 [[영빈 이씨한테이씨]]한테 전쟁놀이를 하였음에도 소학과 학문을 하였다고 거짓을 고하는등 날이가면 갈수록 거짓이 심해졌다. 이를 안 영조는 매우 분노하였으며 몸소 저승전까지 가서 사도세자에게 꾸중을 했다고 한다. 영조는 이상궁과 한상궁을 추궁하는것을 마치지 않고 호된 형벌을 하여 궐 밖으로 내치라는 어명이 떨어졌고 결국 이상궁과 한상궁은 형벌을 받다 죽었다.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에 의하면 이 일로 인해 그는 어렸을 때부터 부왕 영조로부터 극심한 불신과 가혹한 꾸중을 들었다고 하며, 이 때문에 그의 마음에는 불안과 공포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고 하고 영조를 두려워하고 무서워했으며 영조 앞에서는 말 한마디도 못했다고 한다.
 
날이 갈수록 [[청심환]]을 먹지 않고서는 영조 앞에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였으며, 그 상태에서 영조가 무슨 말을 하려고만 해도 곧바로 기절해버릴 정도 였다고 한다.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에 의하면 이는 공포증과 광증(狂症)으로 표출되었다고 한다.
 
15세가 되는 [[1749년]](영조 25년) 승명대리(承命代理)로 [[대리청정]](廳政)을 시작했다. 영조는 세자를 심히 못마땅히 여기면서도 마땅한 대안이 없다는 까닭으로 세자에게서 대리청정을 거두지 않았다. 영조로부터 칭찬이나 격려는 커녕 호통과 때로는 폭설을 들으면서도 세자는 세자된[[세자]]된 책임으로서 대리청정을 수행하였다.
 
[[1750년]] [[혜경궁 홍씨]]로부터 첫 아들인 [[의소세손|세손 정]](琔)이 태어난다. 세손 정의 출생으로 갈등이 일시적으로 완화되었다. 영조는 새로 태어난 세손에게 각별하였다. 남자가 귀해진 왕실에서 그것도 늘그막에 본 귀한 손자라 퍽 이뻐하였고, 사도세자는 아들인 세손을 방패 삼아 영조의 불호령으로부터 피할 수 있었다라 전해진다. 그러나 세손이 유아임에도 병을 앓았고, 영조는 세자가 세손을 제대로 보양하지 못 함이라며 다시 세자에게 칼날을 세웠고 둘 사이는 다시 어긋나기 시작했다. 결국 세손 정은 생후 3년만에 요절하였고, 세자는 부왕과 갈등으로 극심한 스트레스 속에서 [[1752년]] 둘째 아들 [[조선 정조|산]]을 출산한다. 한편 [[의소세손|세손 정]]을 각별히 아꼈던 영조는 어린 세손의 장지와 묘비문, 행장을 직접 지어서 남기며 애통해하였고, 둘째 세손 산을 원손이나 세손에 책봉하는 것도 의소세손의 3년상을 마친 뒤에 하도록 했다.

영조가 귀애하던 화평옹주의 상 중에 태어난 터라 영조는 [[혜경궁 홍씨]]의 출산을 도운 영빈 이씨에게도 책망 할 정도로 아기를 몹시 싫어했다고 한다. 이에 세자는 나 하나도 버거운데 아이는 어찌하나 한탄했다고 한다. 이 아이가 후일의 [[조선 정조|정조]]가 된다.
 
=== 대리청정 기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