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조 (조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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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후반 ===
==== 나경언 사건과 의문의 관서행 ====
영조 37년 4월 세자는 [[평안도]]를 다녀오게 된다. 서명응이나 윤재겸등의 비판상소가 있었으나 장인인 홍봉한과 평안감사이자 화완옹주의 시숙인 정휘량의 도움으로 이일은 영조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당시 약관의 나이이던 정순왕후의 오빠 김귀주는 세자가 평양에 가도록 이를 막지 못하고 영조에게도 알리지 않은 홍봉한과 정휘량을 비판하는 밀봉상소를 영조에게 올렸다가 영조로 부터 질책을 듣는다. 이일로 사건발생 5개월후에야 영조는 세자가 평양에 놀러간걸 알게된다. 또한 [[한중록]]에 의하면 이때 궁궐 바닥에 땅을 파고 공간을 마련하고 군기붙이를 숨겨두려 했다 한다.
 
그가 불시에 [[평안도]]를 방문한 목적과 단시간 내로 오고 간 방법, [[한중록]]에서 지적하는, 그가 궁궐 밑에 비밀리에 땅을 파고 무기를 숨겨둔 사유에 대한 것은 실록이나 한중록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
 
[[1762년]] [[6월 14일]](음력 5월 22일) 영조 38년 [[나경언]](羅景彦)이 세자의 결점과 비행을 10여 조에 걸쳐 열거하였다. 이를 본 영조는 크게 화를 내며 이런 사실들을 자기에게 알리지 않은 신하들을 질책한다. [[나경언]]은 처형되었지만 영조는 세자에 대한 의혹을 거두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