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양동마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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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양동마을'''(慶州 良洞마을)은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경주시)|강동면]] 양동리 북쪽 설창산에 둘러싸여 있는 유서 깊은 양반 집성촌으로 1984년 12월 20일 [[대한민국의 국가민속문화재]] 제189호로 지정되었고, 2010년 7월 31일 [[브라질]] [[브라질리아]]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HC) 제 34차 회의에서 [[안동]] [[하회마을]]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으며,
[[한국]]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되고 규모가 크며, 그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조선]]시대 양반 씨족마을로 [[문묘]] 종사와 [[종묘]] 배향을 동시에 이룬 재상이자 성리학자요 [[영남학파]]의 선구자가 되신 회재 [[이언적]] 선생을 배출한 6대 국반(國班) [[여주이씨]]([[광산 김씨]], [[반남 박씨]], [[은진 송씨]], [[덕수 이씨]], [[진보 이씨]]가 6대 국반), 이조판서와 우참찬을 지내고 청백리에 녹선된 우재 손중돈 선생을 배출한 명문 도반(道班) [[경주손씨]] 양성이 서로 협동하고 경쟁하며 600여년의 역사를 이어왔다. [[영남]] [[남인]]의 구심점 역할을 하면서 문과 31명 포함 과거 급제자가 총 116명에 달했으며, 이밖에도 수많은 학자와 충절대의 명장, 독립운동가를 배출하면서 그 명성을 이어오고 있다.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된
[[한국]]에는 7개소의 국가 지정 전통마을이 있으나 마을의 역사와 규모 및 보존상태, 문화재의 수와 전통성 및 가치, 그리고 뛰어난 건축과 조경양식,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때묻지 않은 향토성 등의 면에서 [[한국]]에서 가장 우수한 가치를 지닌 마을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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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의 가치 ==
양동마을은
첫째, 양동마을은 한국의 씨족마을 중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조선 전기 씨족마을 형성기의 전형 중 하나인 처가입향 유형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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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양동마을은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학술적, 문화적 성과물인 고문헌과 예술작품을 보관하고, 전통적인 가정의례와 특징적인 무형의 마을 행사를 오늘날까지 유지하고 있는 가장 훌륭한 사례이다. <ref>{{웹 인용|url=http://www.cha.go.kr/html/HtmlPage.do?pg=/heritage/world_heritage/culture_treasure_10.jsp&mn=NS_04_04_02|}}</ref>
== 지리 및
[[경주시]] 시내에서 동북방으로 20km쯤 떨어져 있다.
마을은 경주시에서 동북방으로 20km쯤 떨어져 있다. 양동마을은 한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전통마을이다. 이 마을은 씨족마을의 대표적 사례인데, 씨족마을은 성씨를 매개로 하는 부계의 혈연집단이 대를 이어 한 곳에 정착해 이뤄진 정주 형태다. 조선 전기 이후 재산과 제사의 장자 상속이 강화되면서 나타나게 된다. 하나 혹은 두 성씨의 양반이 마을주민의 다수를 차지하면서 의사결정의 주도권을 가지는데 벼농사를 경제적 기반으로 삼는다. 양동마을은 조선 전기 씨족마을 형성기의 한 가지 전형, 즉 혼인으로 처가에 들어와 살면서 자리를 잡는 처가입향의 경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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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동마을은 풍수의 길지에 입지했다. 마을의 뒷배경이자 주산인 설창산의 문장봉에서 산등성이가 뻗어 내려 네줄기로 갈라진 능선과 골짜기가 여럿 나란히 있는 ‘勿(물)’자 형의 형국에 자리 잡고 있는데 이 마을은 조선시대 유명한 지리지인 [[택리지]]에서 길지로 언급됐으며 [[조선의 풍수]]에서‘삼남의 사대길지’에 포함됐다. 이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많은데 일예로 勿자의 아랫부분에 획 하나를 더하면 血자가 된다하여 일제가 계획한 마을 안으로의 철도통과를 우회시켰고, 남향의 양동초등학교 건물을 동향으로 돌려 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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