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범: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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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범'''(李鍾範, [[1970년]] [[8월 15일]] ~ )은 전 [[KBO 리그]] [[KIA 타이거즈]]의 [[내야수]] 겸 [[외야수]]이자, 현 [[LG 트윈스]] 코치이다. 현역 시절 팀의 정신적인 지주이자 구심점으로 통하며 최고의 선수로 군림했으며, ‘야구천재’, ‘종범신(神)’, ‘바람의 아들’로 불린다.<ref>{{뉴스 인용 |제목 =<프로야구> 이종범, 되살아난 해결사 본능 |url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2696917|출판사 =연합뉴스 |저자 =장현구 |날짜 = 2009-06-03 |확인날짜 =2017-12-02 }}</ref><ref>{{뉴스 인용 |제목 =[KS]'베테랑' 이종범의 활약이 값진 이유 |url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44&oid=109&aid=0002058262|출판사 =OSEN |저자 =손찬익 |날짜 = 2009-10-17 |확인날짜 =2017-12-02 }}</ref> 우투우타이지만, 일상 생활 때에는 왼손을 사용하는 [[왼손잡이]]로 어릴 때 오른손 글러브 밖에 없어 오른손으로 연습해서 야구를 오른손으로 하게 됐다고 한다.<ref>{{뉴스 인용|저자=강명석|제목=[(이종범) 10아시아] <3> (이종범) 10아시아|url=http://10.asiae.co.kr/Articles/new_view.htm?a_id=2012041310213833587|출판사=10아시아|날짜=2012-04-13|확인날짜=2012-06-02}}</ref> [[1993년]] [[건국대학교]]를 졸업하고 [[해태 타이거즈]]의 1차 지명을 받아 입단해 1993 시즌에 신인왕은 [[양준혁]]에게 내줬지만 공수주에서 화려한 플레이를 펼쳐 단숨에 스타덤에 올랐다. 같은 해 한국시리즈에서 맹활약하며, 신인으로는 처음으로 시리즈 MVP에 올랐고 이후 1994 시즌 84도루로 역대 시즌 최다 기록을 세우는 등 국내 프로야구를 호령했다. 1997 시즌을 끝으로 국내를 떠나 일본프로야구 [[주니치 드래곤즈]]로 이적한 그는 ‘한국의 [[스즈키 이치로|이치로]]’라는 평가를 받으며 기대를 받았으나, 기량 부족, 팔꿈치 부상, 리그 적응 실패 등으로 부진을 거듭했고 결국 2001 시즌 중 국내에 복귀했다.<ref>{{뉴스 인용 |제목 =이종범, 일본 야구에 한풀이 |url =http://sports.news.naver.com/sports_general/news/read.nhn?oid=109&aid=0000028659&redirect=false|출판사 =OSEN |저자 =박승현 |날짜 = 2006-03-16 |확인날짜 =2017-12-02 }}</ref> 국내로 돌아온 후에도 그는 국내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간판선수로 성가를 떨쳤다. [[2012년]] 시즌을 준비하던 중 갓 취임한 [[선동열]] 감독과 [[이순철]] 수석코치 그리고 구단에게 은퇴 권고를 받고 [[2012년]] [[3월 31일]] 은퇴 선언을 하였다.<ref>[http://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baseball&ctg=news&mod=read&office_id=001&article_id=0002923144 <프로야구> 이종범 '아들이 좌타자 한 풀어줘']《연합뉴스》 2009년 10월 17일 15:05</ref> [[2012년]] [[5월 26일]] 당시 [[KIA 타이거즈]]의 홈 구장이었던 [[광주무등경기장 야구장]]에서 모든 선수들이 7번 유니폼을 입고 경기에 임하였고, 경기 종료 후 은퇴식을 치러 그의 등번호 7번은 [[영구 결번]]으로 남게 되었다. [[2013년]]부터 [[2014년]]까지 [[한화 이글스]] 주루 코치를 담당하였고, [[2014년]] [[11월 6일]] [[MBC 스포츠+]]와 계약을 맺고 2015 시즌 해설자로 변신했다. 2016년 장남 [[이정후]]가 [[넥센 히어로즈]]에 1차 지명이 되자 [[KBO 리그]] 역대 최초로 1차 지명으로 프로에 입성한 부자(父子) 선수로 화제를 모았다.<ref>{{뉴스 인용|url=http://sports.news.naver.com/kbaseball/news/read.nhn?oid=076&aid=0002950252|제목=피는 못속여. 이종범-이정후 KBO리그 최초 부자 1차지명|확인날짜=2017-03-30}}</ref><ref>{{뉴스 인용 |제목 ='넥센 지명' 이정후, "아버지보다 뛰어난 선수 되겠다" |url =http://sports.news.naver.com/kbaseball/news/read.nhn?oid=109&aid=0003346383&redirect=false|출판사 =OSEN |저자 =고유라 |날짜 = 2016-06-27 |확인날짜 =2017-11-29 }}</ref> 본인은 [[양준혁]]에게 밀려 신인왕 수상에 실패했지만, [[이정후]]가 신인왕을 수상하면서, 그 한을 풀었다.
 
==선수 시절==
===아마추어 시절===
[[광주제일고등학교|광주일고]] 졸업 후 [[연세대학교|연세대]], [[고려대학교|고려대]], [[한양대학교|한양대]] 등 야구 명문 대학으로부터 거액의 스카웃 제의를 받았으나 장학금을 받고 [[광주제일고등학교|광주일고]] 동료 3명을 끼워서 받아 주는 조건으로 [[건국대학교]] 경영학과로 진학했다. 국가대표 [[유격수]] 자리를 꿰찼고, [[한양대학교]] 특급 [[유격수]] [[유지현 (야구인)|유지현]]은 국가대표팀에서 2루수로 자리를 바꿨으며, 이 둘은 역대 최고의 국가대표팀 키스톤 콤비로 불렸다.
 
===한국 프로야구 시절===
====[[해태 타이거즈]] 시절====
[[1993년]] [[건국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1차 지명을 받아 연고 팀 [[KIA 타이거즈|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했다. [[KIA 타이거즈|해태]] 시절인 [[1994년]] [[한국 프로 야구 최우수 선수|한국 프로 야구 최우수 선수상]], [[1993년]]과 [[1997년]] [[한국시리즈]] MVP를 수상하였다.
입단 첫 해 뛰어난 실력으로 [[삼성 라이온즈]]의 [[양준혁]]과 신인왕을 다투었으나 [[양준혁]]에게 밀려 수상에는 실패하였다. 그 해 [[1993년 한국시리즈|한국시리즈]]에서 독보적인 활약으로 [[한국시리즈]] MVP에 오른다. 그리고 다음 해인 [[1994년]] 시즌은 그의 선수 시절 가장 절정에 달한 시즌으로 단일 시즌 최다 안타(196안타), 단일 시즌 최다 도루(84도루)에 19홈런을 기록하는 활약을 하였다. 후일 TV 프로그램에서 4할을 못한 것은 배탈로 13타수 1안타에 그친 시즌 막판 세 게임과 4할보다는 200안타를 목표로 했던 것이 큰 원인이었다고 말하였다.<ref>{{뉴스 인용|저자=김형준|제목=[프로야구 기록추적] <3> 이종범의 4할, 누가 저지했나|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224&aid=0000001190&|출판사=네이버스포츠|날짜=2009-05-04|확인날짜=2009-10-25
}}</ref> [[1995년]] 시즌에 동계 훈련을 불참하고 방위병으로 입대하여 복무를 병행, 광주 홈 경기에서만 뛰게 된다.(126경기 중 63경기) 그럼에도 홈런 9위, 도루 6위에 오르며 호타준족의 대명사임을 증명한다. 이종범이 2루 주자일때 스퀴즈 번트로 홈으로 들어오는 작전조차 자주 걸릴 정도였다 (2루 스퀴즈작전)<ref name="네이버사사구">{{뉴스 인용|저자=네이버사사구|제목=사사구21회|url=http://sports.news.naver.com/videoCenter/index.nhn?uCategory=kbaseball&category=kbo&id=24845&listType=season&season=13&page=1|출판사=코리아볼닷컴|날짜=2012-05-29|확인날짜=2012-06-03
}}</ref>. 이후 [[1993년]] 첫 우승과는 달리, 당시 ‘[[무등산]] 폭격기’로 불리던 국보급 투수 [[선동열]]이 [[일본]] [[주니치 드래건스]]로 이적하여 없었던 [[KIA 타이거즈|해태 타이거즈]]가 많은 전문가의 예상을 깨고 2시즌을 연속으로 우승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당시 이종범은 1번 타자 및 유격수로 뛰며, [[1996년]]에는 타율 .332(2위) 25홈런(3위) 58도루(1위)로, 또한 다음해인 [[1997년]]에는 .324(5위), 30홈런(2위), 64도루(1위)의 성적을 기록했다.<ref name="데일리안">{{뉴스 인용|저자=이정래|제목=이종범, 1994년을 만들어내다|url=http://sports.media.daum.net/nms/baseball/news/general/view.do?cate=23789&newsid=292152&cp=dailian&_RIGHT_SPORTS=R1|출판사=데일리안|날짜=2008-02-14|확인날짜=2009-10-25
}}</ref> 역대 [[유격수]] 포지션을 맡은 선수가 150개 이상의 안타를 때려 내고, 0.580 이상의 장타율과 1점대가 넘는 OPS를 기록한 경우는 [[1994년]]의 그와 [[1997년]]의 그 단 두 번뿐이다.<ref name="데일리안"/>
유격수 수비에서 강견이지만 타구 판단, 송구 정확도 등에서는 문제가 있었다. 후일 일본 진출 이후와 한국 복귀 후에도 유격수 자리를 맡지 못하는 원인이 된다. [[유격수]]가 20-20을 기록한 경우는 [[1996년]]의 이종범 이후 굉장히 드물었으며, [[2012년]] 광주일고 후배인 [[강정호]]와 2016년 김하성이 뒤를 잇는다.
 
==일본 프로야구 시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