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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0년]](명종 15년) [[과거 제도|무과]](武科)에 급제, [[선전관]]을 거쳐<ref>호음잡고 제7권, 有明朝鮮國 贈嘉善大夫兵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行通訓大夫定州牧使宋公墓碣銘</ref> [[형조]][[좌랑]]으로 재직 중 [[1560년]](명종 15) [[순회세자]]의 세자 책봉을 기념하는 별시무과를 시행할 떄, [[고경명]](高敬命), [[권철]](權轍) 등과 함께 참고관(參考官)의 한사람이 되었다. [[1567년]] [[형조]][[정랑]]이 되었다. 이후 경상우도수군절도사 등을 역임했다.
 
[[1580년]](선조 15년) [[2월]] [[길주군|길주]][[목사]]로 부임했다가 그해 [[8월]] 체직되었고, [[전라좌도]][[수군절도사]]로 부임하였다. 부임 직후 그는 전임자의 말을 듣고 [[이순신]]을 미워하여, 전라좌수사 부임 초기 좌수영 관하의 다섯 포구인 발포, 여도, 사도, 녹도, 방답진을[[방답진]] 등을 점검하였다. 이때 다른 4개의 포구 이탈자는 보고하지 않고, 이순신이 지휘하는 포구의 3명만 보고하였다. 이순신은 다른 4개 포구의 결과를 조사하여 보고하려 하자, 이용은 즉시 장계를 회수하였다. 이에 [[이순신]]의 인사 고과를 낮게 매겨서 조정에 보고하였다가, [[전라도]]도사로 온 [[조헌]](趙憲)의 항의로 뒤에 수정하였다. 이때 그는 전임자 [[성박]](成博) 또는 [[서익]](徐益)의 말을 전해 듣고 [[이순신]]을 미워하였으나, 함께 근무하다가 [[이순신]]의 인품에 탄복하여 뜻을 바꾸었다. 나중에는 [[함경남도]][[병마절도사]] 부임 시, 자신의 군관과 건원보 [[권관]]으로 [[이순신]]을 적극 추천하기도 했다.
 
[[1582년]](선조 16) [[2월]] [[북병사]]로 부임하였으나, 그해 [[8월]] [[경성]]에 첩을 솔축했다는 이유로 고산[[찰방]](高山察訪)이 장계를 올려 면관시켰다.
 
이후 함경남도절제사와 도[[순찰사]](都巡察使)를 거쳐 [[1583년]](선조 16년) [[1월]] [[함경남도]][[병마절도사]]로 부임하였다. [[2월]] [[이탕개]] 등 국경지대의 여진족이 기습공격하여 [[이탕개의 난]]이 발생, [[경원부]](慶源府)를 함락시키자 [[병마사]] 이제신(李濟臣)의 급보를 받고, [[선조]]는 오운(吳沄)과 박선(朴宣)을 조방장으로 삼아 용사 8천 명먼저 보내고 이용은 방어사로 임명했다가, 다시 경기 감사 [[정언신]](鄭彦信)을 [[우참찬]] 겸 도순찰사로, 이용은 남도병마사(南道兵馬使)로 삼아 지원하게 했다.<ref>국조보감 제28권 선조조 5 16년(계미, 1583) </ref> 그해 가을[[7월]] 직접 청을 올려 [[이순신]](李舜臣)이 남병영의 군관으로 천거하여<ref>이충무공전서 권9, 행록, 종자 정랑 분(正郞芬)</ref>, 이순신을 남병사 군관으로 오게 했다. 이후 임기만료된 이순신을 건원보 권관으로 추천하였다. 그 뒤 그는 [[함경북도]][[병마절도사]]를 거쳐 [[1587년]](선조 20) [[7월 4일]] [[인천부사]]로 부임했다가 1588년 6월 28일 눈이 어둡다 하여 [[승정원]]의 계로 파직되었다.
 
청백하고 엄정하였으며 오랑캐들이 이용의 이름만 듣고도 겁을 먹었다고 한다. [[1591년]](선조 24) [[1월]]에 사망하니 향년 58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