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혈: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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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와 중세
고대인들은 다른 사람의 피를 섭취하면 젊음과 활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생각을 상당수 갖고 있었으며, 고대 [[잉카]] 제국에서는 일찍부터 종교적인 목적으로 수혈과 비슷한 행위가 있었다.(거의 모든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혈액형은 모두 Rh+의 O형 한 가지 혈액형만을 존재하기 때문으로 치명적 부작용 없이 수혈이 가능했다.) <ref>{{뉴스 인용|제목=사이언스 타임지 가을은 AB형... 인디언은 모른다
혈액형이란 바벨탑을 무너뜨릴까|url=http://www.sciencetimes.co.kr/article.do?todo=view&atidx=0000027119|확인날짜=2008년 8월 22일}}{{깨진 링크|url=http://www.sciencetimes.co.kr/article.do?todo=view&atidx=0000027119 }}</ref> 혈액 대한 순환의 개념이 없던 15세기 제컬리 더핀에 의하면 1492년에 뇌졸증과 열병에서 시달리는 [[교황 인노첸시오 8세]](이노센트 8세,이노켄티우스 8세)가 말년에 주치의에 의해 10세 어린아이들 <ref>(어린 소녀 2명 혹은 3명이라는 애기가 있다.)</ref>에게 뽑은 피를 주입하다가 모두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 동물 혈액을 통한 수혈치료 개념의 시작
근대적인 수혈 치료 개념 시작은 르네상스가 끝날 무렵인 17세기 초 1628년에 [[윌리엄 하비]](William Harvey)의 동물 해부를 통해 처음으로 혈액 순환론을 발표 되면서 시작되었다. 1650년대에는 [[크리스토퍼 제임스 렌]](Cristopher James Wren)은<ref>([[크리스토퍼 제임스 렌]]은 17세기를 대표하는 영국의 천문학자,건축가이다. 그의 인생 후반에는 런던의 세인트폴 대성당 등 런던 53개의 교회들을 을 설계하며, 영국 르네상스 건축의 지도자가 된다.)</ref> 공기주머니가 달린 가늘고 긴 빨대 모양의 기본적인 형태의 피하주사기 모형을 발명하였다. 1665년 2월에 [[리처드 로어]](Richard Lower)라는 학자 의해 옥스포드대학에서 최초의 수혈 실험이 이루어졌다.두 마리의 개를 가지고 실험을 하였는데 한쪽 개의 목에 있는 동맥을 다른 개의 정맥에 연결한 후 혈액이 주입되게 하였는데 죽기 일보 직전까지 피를 흘리게 한 개에게 다시 피를 주입함으로써 완전히 회복시킬 수 있었다는 결과를 1666년에는 발표함으로 동물간 수혈이 가능하다는 결과를 얻었다. <ref>(당시에는 몰랐으나 개의 경우에는 단일 혈액형만 존재함 있기 때문에 성공했다.)</ref> 또한 그 실험에 영향 받아 최초로 동물의 혈액을 사람에게 수혈하는 시도가 있었다. 프랑스 루이14세의 주치의 중 한 사람인 프랑스 사람 [[장 밥티스트 드니]](Jean Denis)<ref>장 드니는 정식적인 의료교육을 받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ref>가 1667년 6월에 양의 피를 원인 모를 열병을 앓고 있던 15세 소년에게 주입하여 시도 되었는데 <ref>처음 시도했을 때는 사람의 피를 사람에게 옮긴게 아니라, 수혈을 영양섭취의 한 형태라고 여겼기 때문에 즉 사람의 혈액으로 수혈하면 식인행위로 생각했기에 동물의 피를 사람에게 수혈했었다</ref> 같은 해에 여러번 동물의 피를 사람에게 수혈하는 치료를 계속하여 비교적 성공처럼 보였으나,<ref>(동물의 피를 사람에게 주입하는 자체가 매우 위험하고 부작용을 피할 수는 없겠으나 당시에 비교적 적은양의 혈액 주입이 되었을 것으로 여겨지고 주입된 동물의 혈액 자체도 이미 세포조직이 파괴되어 인체와 부작용반응도 일어나지 않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 당시에 시행된 수혈은 현대 수혈처럼은 부족한 혈액을 보충하기 위한 치료방법이 아니라 다른 목적의 치료였다.)</ref>. 1667년 12월 정신 발작 질환을 알던 환자에게 <ref>환자에게 2차례의 수혈시도가 있었고, 그 후 송아지의 피를 3번째로 추가 수혈시도 한 뒤 하루 지난 후의 환자가 사망하였다. </ref> 수혈시도 후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법정은 장 밥티스트 드니에게 책임이 없다고 판결<ref>다른 원인의 질환으로 사망한 것으로 판결됨</ref>을 내렸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프랑스와 영국,로마 가톨릭교회에선 공식적으로 수혈을 금지했다 또한 비슷한 시기에 영국에서 런던 거리의 부랑자들의 대상<ref>금화 몇닢으로 거리의 부랑자에게 주면서 동물의 피를 주입함으로 비교적 큰 문제없어 보이게 수월하게 실험하였다.</ref>으로 동물의 피를 소양 주입하는 실험시도가 있었고, 1628년경에도 이탈리아의 의사인 [[조반니 콜레]]에 의해서도 수혈의 시도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치명적인 부작용을 피할 수 없었으며, 그런 이유로 많은 사람이 죽었기 때문에 17세기 후반 이후에는 프랑스·영국·이탈리아에서 수혈이 금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