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국 시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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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 시대'라는 용어는 발해를 배제하고 신라만을 정통 역사로 인정, "신라가 삼한을 하나로 통합하다"(統一)라는 뜻이므로 발해가 제외되어 있다. 때문에 한국의 사학계에서 스스로 발해를 외면했다는 이유로 중국 일부 사학계의 [[동북공정]]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쓰이고 있다. 실제로 중국학계에서는 현재 "통일된 신라"(统一的新罗)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때문에 한국학계 일부에서는 최초의 역사적 통일은 신라가 아닌 [[고려]]가 이루었다고 보는 반성도 있다. 비록 발해의 영토와 인구 대부분은 고려가 흡수하지 못했지만, 인도주의적인 형태로 [[고려 태조]] 왕건은 [[926년]] 발해가 멸망하자, 934년, 태자 [[대광현]]을 비롯한 발해 유민들을 수용하였고, 대광현에게 왕씨 성을 주어 왕족에 버금가는 반열에 들게 하였다.
 
==통일신라 후기 신라 ==
{{본문|통일신라}}
[[한반도]] 남부 통합한 신라는 [[9주 5소경]]을 설치하고 고도의 중앙집권체계를 확립하였다. 집사부 장관인 시중의 권한이 강화되어 왕권의 전제화가 실현되었다. [[신문왕]]은 녹읍을 폐지하였으며, 유학 교육을 위해 국학을 설립하였다. 진골귀족과 대결 세력이었던 득난세력(6두품)이 왕권과 결탁하여 상대적으로 부각되었으나, 골품제는 유지되었고 진골귀족의 고위직 독점은 여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