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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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10일]] 20시 40분경, [[채종기]]가 시너를 부은 다음 라이터로 불을 붙여서 일어난 불이 흰 연기와 함께 숭례문 2층에서 발생하여 소방 당국은 신고를 받고 소방차 32대, 소방관 128명을 현장에 출동시켜 불씨를 제거하고자 건물 일부를 잘라내고 물과 소화 약제를 뿌리며 화재 진압에 총력을 기울였으나 [[2월 11일]], 0시 25분경, 2층 누각 전체가 불에 휩싸이고 화재 4시간 만에 0시 58분경 지붕 뒷면이 붕괴되기 시작했고 곧 2층이 붕괴되었다. 이어 바로 1층에 불이 붙어 새벽 1시 54분에는 누각을 받치는 석축만을 남긴 채 모두 붕괴되어 발화 5시간 만에 2층 문루는 90%, 1층 문루는 10%만 소실되었다.<ref>{{뉴스 인용 |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ec&sid1=102&sid2=249&oid=001&aid=0001953940&iid= |제목='국보 1호' 숭례문 전소…완전 붕괴(종합) |출판사=연합뉴스 |날짜=2008-02-11}}</ref>
 
한편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2월 12일]] 국무회의 전 인터뷰에서 "파괴돼도 좋으니까 진화하라"고 소방방재청에 위임했었음을 밝혔다. 현재 문화재 관리책임은 지자체 즉 이 사건에서는 [[서울특별시청]]에 있지만 지도 감독 및 지원은 [[문화재청]]의 책임임을 인정하였다. 결국 [[유홍준]]은 [[2월 12일]]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기자간담회를 갖고 "숭례문 화재 사건을 책임을 지고 대통령에게 사직서를 제출했다"며 사직서를 제출했음을 발표했다.<ref>{{뉴스 인용 |제목 = 유홍준 "문화재청장직 사직서 제출"(2보) |url = http://www.yonhapnews.co.kr/culture/2008/02/12/0901000000AKR20080212137900005.HTML |출판사 = 연합뉴스 |날짜 = 2008-02-12 |확인날짜 = 2008-02-12 }}{{깨진 링크|url=http://www.yonhapnews.co.kr/culture/2008/02/12/0901000000AKR20080212137900005.HTML }}</ref>
 
이명박은 이 현장을 방문하였다. 그는 국민성금으로 복원하자고 제안하였으며 2008년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국민 모금운동을 전개하겠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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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사에 얽매이지 말고 미래로 나아가자'를 모토로 [[일본]]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추구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삼일절, 친일절 되다|url=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080302142911&Section=|출판사=프레시안|저자=진중권|날짜=2008-03-02}}</ref> 하지만 오히려 일본 교과서의 [[독도]] 자국 영토 명기사건이 발생하면서 한일관계의 긴장이 고조되고,<ref>{{뉴스 인용|제목=정부, 일본에 독도 기술 시정 요구|url=http://www.ytn.co.kr/_ln/0101_200809060129257627|출판사=YTN|저자=윤경민|날짜=2008-09-06|확인날짜=2009-11-19}}</ref> [[미국지명위원회]](BGN)에서 독도를 주권미지정지역 ‘리앙쿠르 섬’으로 명시한 상황이 밝혀졌다.<ref>{{뉴스 인용|제목=<美BGN 독도 결정..'리앙쿠르암' 연원은>|url=http://news.naver.com/main/hotissue/read.nhn?mode=LSD&mid=hot&sid1=100&sid2=267&gid=144446&cid=144169&page=10&iid=42510&oid=001&aid=0002194421|출판사=연합뉴스|저자=김귀근|날짜=2008-07-28}}</ref>
 
이후 대한민국 정부의 외교 총력 대응으로 일주일 만에 [[미국]] 부시 행정부에서는 한국령으로 [[독도]]의 지위를 원래대로 바꾸었다.<ref>{{뉴스 인용|제목=조시 부시, 그가 한국에 준 7가지 선물|url=http://news.mk.co.kr/outside/view.php?year=2009&no=517597|출판사=매일경제|저자=장광익, 박봉권, 김규식, 이덕주|날짜=2009-10-05|확인날짜=2009-11-19}}{{깨진 링크|url=http://news.mk.co.kr/outside/view.php?year=2009&no=517597 }}</ref> 전문가들은 "국제사회에서 한국 편을 서거나 일본 편을 서게 하는 식의 단순한 대응은 곤란하다"면서 "역사적 맥락을 강조하며 일본의 야욕을 무력화하는 설득력있는 외교노력이 어느 때보다도 중요하다"라고 평가했다.<ref>{{뉴스 인용|제목=<독도 문제 '숨고르기'..체계적 대응해야>|url=http://news.naver.com/main/hotissue/read.nhn?mid=hot&sid1=100&sid2=267&gid=144446&cid=144169&iid=43553&oid=001&aid=0002205991|출판사=연합뉴스|저자=이우탁|날짜=2008-08-04|확인날짜=2009-11-19}}</ref>
 
한편 [[일본 방위성]]이 발행하는 2008년판 방위백서에 [[독도]] 영유권과 관련된 일본측 표기 문제로 한일 관계가 다시 냉각되었다.<ref name="segye2">{{뉴스 인용|제목=일본 방위백서 4년 연속 "독도는 일본땅" 명시|url=http://www.segye.com/Articles/NEWS/INTERNATIONAL/Article.asp?aid=20080901002908&subctg1=&subctg2=|출판사=세계일보|저자=정승욱|날짜=2008-09-01|확인날짜=2009-11-19}}</ref><ref>{{뉴스 인용|제목=日 방위백서 '독도영유권' 표기 파문(종합2보)|url=http://news.naver.com/main/hotissue/read.nhn?mid=hot&sid1=100&sid2=267&gid=144446&cid=144169&iid=46740&oid=001&aid=0002247749|출판사=연합뉴스|저자=이우탁, 최이락|날짜=2008-09-01}}</ref> [[대한민국 국방부]]는 [[9월 5일]], [[일본 정부]]가 각료회의를 열고 독도가 자국 영토라는 주장을 담은 2008년 방위백서를 의결한 것과 관련해 "한일관계 미래지향적 발전 가로막는 행위"라며 한국 주재 일본 국방무관을 불러 항의했다.<ref>{{뉴스 인용|제목=日방위백서 5년째 “독도는 일본땅”|url=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90718002012|출판사=서울신문|저자=김미경|날짜=2008-07-16|확인날짜=2009-11-19}}</ref> 이처럼 [[일본 방위성]]은 방위백서를 [[2008년]]까지 4년 연속 "독도는 일본땅"으로 명시하면서 태도를 바꾸지 않고 있어 한일 관계의 잠재적 마찰 가능성이 우려되기도 했다.<ref name="segye2" />
 
이명박 대통령은 3번째 한일 정상회담을 열어서 한일관계의 '셔틀외교'를 복원하자는 의견에 합의하여 [[아소 다로]](麻生太郞) [[일본 총리]]는 [[2009년]] [[1월 11일]]에서 [[1월 12일]]까지 이틀간 취임 후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李대통령 "아소 총리, 가장 많이 만난 외국정상"|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3&aid=0002473129|출판사=뉴시스|저자=김선주|날짜=2009-01-12|확인날짜=2009-11-19}}</ref> 당시에 아소 총리가 방한하게 되면 한일 정상간 셔틀외교가 다시 복원되는 의미를 갖고있다는 평가가 있었다.<ref>{{뉴스 인용|제목=다음달 10~12일께, 서울서 세 번째 한일정상회담|url=http://www.asiatoday.co.kr/news/view.asp?seq=194248|출판사=아시아투데이|저자=주진|날짜=2008-12-28}}</ref><ref>{{뉴스 인용|제목=아소 日총리, 내년 1월11~12일 취임후 첫 한국 방문|url=http://news.cnbnews.com/category/read.html?bcode=63930|출판사=CNBNEWS|저자=심원섭|날짜=2008-12-29|확인날짜=2009-11-19|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21211093645/http://news.cnbnews.com/category/read.html?bcode=63930|보존날짜=2012-12-11|깨진링크=예}}</ref> 이 회담에서 아소 다로 일본 총리는 "한일 경제연대협정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ref>{{뉴스 인용|제목=아소 총리 "한-일 경제연대협정 필요" |url=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japan/332671.html|출판사=한겨레|저자=권태호, 최우성|날짜=2009-01-11|확인날짜=2009-11-19}}</ref><ref>{{뉴스 인용|제목=‘경제’화두 국제공조 논의…새해 첫 한·일 정상회담|url=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1121820515&code=910302|출판사=경향신문|저자=김정선|날짜=2009-01-12|확인날짜=2009-11-19}}</ref> 그러나 독도 문제와 역사 문제 등 민감한 문제는 논의되지 않아<ref>{{뉴스 인용|제목=경제문제 집중, 독도-과거사 의제서 제외|url=http://www.donga.com/fbin/output?n=200901130145|출판사=동아일보|저자=정용관|날짜=2009-01-13|확인날짜=2009-11-19}}</ref> '절반의 성과'에 그쳤다는 지적이 있었다.<ref>{{뉴스 인용|제목=한일정상회담, 독도문제는 비켜가 '절반의 성과' |url=http://media.paran.com/hotissue/newsview.php?dirnews=1966816&year=2009&theme=12168|출판사=노컷뉴스|저자=곽인숙|날짜=2009-06-29}}{{깨진 링크|url=http://media.paran.com/hotissue/newsview.php?dirnews=1966816&year=2009&theme=12168 }}</ref>
 
한편, [[2008년]] [[7월 9일]] [[일본]] [[홋카이도]] 도야코 G8 정상회담 기간 중 한일 정상이 만났을 때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총리가 중학교 사회과목을 가르치는 새 학습지도 요령해설서에 "독도 영유권을 명기할 수밖에 없다"라고 전했을 때 "지금은 곤란하다, 기다려달라"라고 말한 것으로 [[요미우리 신문]]은 보도했다.<ref>{{뉴스 인용|제목="이 대통령 지금은 곤란하다"...요미우리 신문 보도|url=http://www.ytn.co.kr/_ln/0104_200807151240205925|출판사=YTN|저자=김상우|날짜=2008-07-15}}</ref> 청와대는 이 사실을 부인했으며, 결국 [[2009년]] [[8월]]에 [[민주당 (대한민국)|민주당]] 및 일부 시민들이 이를 보도한 [[요미우리 신문]]에 대해 사실 여부 확인을 위한 손해배상과 정정보도 청구소송을 냈다.<ref>{{뉴스 인용|제목=독도 허위보도 요미우리 신문에 4억 소송|url=http://www.asiae.co.kr/news/view.htm?idxno=2009081316295447757|출판사=아시아경제|저자=양혁진|날짜=2008-08-13|확인날짜=2009-11-19}}</ref>
 
일본의 새로운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일본 민주당]] 내각의 등장으로 외교 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ref>{{뉴스 인용|제목=[日 정권교체]가깝고 먼 한일관계 이번엔 가까워질까?|url=http://www.asiatoday.co.kr/news/view.asp?seq=280563|출판사=아시아투데이|저자=신대원|날짜=2008-08-31|확인날짜=2009-11-19}}</ref> '한중·한일 연쇄 정상회담'에서 아시아 외교를 중시하는 하토야마 일본 총리는 "[[일본 민주당|민주당]] 새 정권은 역사를 직시할 용기를 가지고 있다"라면서 양국의 과거사 문제에 대한 전향적인 자세를 나타냈다.<ref>{{뉴스 인용|제목=MB·하토야마 막걸리 건배 … 진전된 과거사 언급 나올까|url=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3814713|출판사=중앙일보|저자=서승욱, 김동호, 조문규|날짜=2009-10-09|확인날짜=2009-11-19}}</ref>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한일간 공조에도 합의했다.<ref>{{뉴스 인용|제목=하토야마총리 "그랜드 바겐, 아주 정확하고 올바른 방안"|url=http://www.edaily.co.kr/News/Economy/NewsRead.asp?sub_cd=IB61&newsid=01938486589851280&clkcode=00203&DirCode=00307&OutLnkChk=Y|출판사=이데일리|저자=김세형|날짜=2009-10-09|확인날짜=2009-11-19}}</ref> 특히 한미간 합의된 ‘그랜드 바겐’ 처리 방식에 대한 지지, 재일 한국인의 참정권 문제의 해결을 위한 노력 등을 통한 한일 관개 개선 의지 등은 이전 [[자유민주당 (일본)|자민당]] 정권과 다른 방식의 접근이라 귀추가 주목되기도 했다.<ref>{{뉴스 인용|제목="북핵 그랜드 바겐 해법 적극 공감"|url=http://news.hankooki.com/lpage/politics/200910/h2009101002303221040.htm|출판사=한국일보|저자=염영남|날짜=2009-10-10|확인날짜=2009-11-19|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01021032011/http://news.hankooki.com/lpage/politics/200910/h2009101002303221040.htm|보존날짜=2010-10-21|깨진링크=예}}</ref><ref>{{뉴스 인용|제목=한일 정상회담…일 '그랜드 바겐' 지지|url=http://mbn.mk.co.kr/news/newsRead.php?vodCode=460908&category=mbn00003|출판사=mbn|저자=정창원|날짜=2009-10-09|확인날짜=2009-11-19}}</ref>
 
[[2009년]] [[12월 14일]], [[일본 민주당]]의 [[오자와 이치로]](小澤一郞) 간사장은 방한한 자리에서 "일본과 일본 국민으로서 사죄하지 않으면 안 될 역사적 사실이 있다"면서 한국에 대한 과거사 문제에 사과했다.<ref>{{뉴스 인용|제목="日, 한국인에 사죄할 역사 있다"|url=http://news.donga.com/3/all/20091214/24774852/1|출판사=동아일보|저자=민동용|날짜=2009-12-14|확인날짜=2009-12-15}}</ref> 하지만 [[12월 25일]]에 [[일본 문부과학성]]이 일본의 [[독도]] 영유권을 고수한 고등학교 지리·역사 과목의 새 교과서 학습지도요령 해설서를 발표하자 정부는 '유감'을 표시하는 등의 일이 발생했다.<ref name="yonhap2">{{뉴스 인용|제목=日'독도영유권' 고수..정부 '유감' 표명(종합)|url=http://news.naver.com/main/ranking/read.nhn?mid=etc&sid1=111&rankingType=popular_day&oid=001&aid=0003042960&date=20091225&type=1&rankingSeq=1&rankingSectionId=100|출판사=연합뉴스|저자=이우탁, 최이락|날짜=2009-12-25|확인날짜=2009-12-25}}</ref> 하지만 가와바타 다쓰오(川端達夫) [[일본의 문부과학대신|문부과학대신]]이 "다케시마(竹島)는 우리의 고유 영토로, 정당하게 인식시키는 것에 어떤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밝히자 이에 대해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이 주한일본대사를 불러 항의하는 등 갈등이 발생했다.<ref name="yonhap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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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892456 "미국산 쇠고기 들어간 급식먹고 뒈지라고?", "정치논리? 내 아이 밥이 걸린 문제예요"] 《오마이뉴스》 2008-05-03 13:01</ref> 일부 연예인들은 시위에 참가하거나 자신의 미니 홈피에 이명박 대통령과 미국 쇠고기 수입에 대한 비판의 글을 담기도 하였다.
이명박 대통령의 미니홈피에 누리꾼들의 각종 댓글이 쇄도하여 게시판을 폐쇄하기도 하였고,<ref>[http://www.dailian.co.kr/news/n_view.html?id=109941&sc=naver&kind=menu_code&keys=7 이 대통령 미니홈피, 폭주하는 악플에 손 들다] 《데일리안》 2008-04-30 13:10:57</ref>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탄핵 서명운동이 인터넷에서 벌어져 [[5월 4일]]에 100만 명을 돌파하였다.<ref>
[http://www.segye.com/Articles/NEWS/ECONOMY/Article.asp?aid=20080504001294&subctg1=&subctg2= '이명박 탄핵' 서명 100만명 돌파] 《세계일보》 2008.05.04 18:07</ref><ref>[http://sports.jknews.co.kr/article/news/20080502/4235953.htm 소신 있는 연예인들의 쓴소리 … "미국산 쇠고기 수입 절대 막아야"] {{웨이백|url=http://sports.jknews.co.kr/article/news/20080502/4235953.htm |date=20080605134900 }} 《한국재경신문-연예》 2008.05.02</ref> [[5월 6일]] [[농림수산식품부]]와 [[보건복지가족부]]가 주최하는 미국산 쇠고기 안전성 설명회가 서울 세종로 외교통상부청사에서 열리는 등, 정부의 대책이 뒤따랐으나, [[6월 2일]]의 여론 조사에서는 대다수 국민들이 협상에 반대한 것으로 나타났다.<ref>
[http://sports.jknews.co.kr/article/news/20080502/4235953.htm 소신 있는 연예인들의 쓴소리 … "미국산 쇠고기 수입 절대 막아야"] 《한국재경신문-연예》 2008.05.02</ref> [[5월 6일]] [[농림수산식품부]]와 [[보건복지가족부]]가 주최하는 미국산 쇠고기 안전성 설명회가 서울 세종로 외교통상부청사에서 열리는 등, 정부의 대책이 뒤따랐으나, [[6월 2일]]의 여론 조사에서는 대다수 국민들이 협상에 반대한 것으로 나타났다.<ref>
[http://news.sbs.co.kr/section_news/news_read.jsp?news_id=N1000424550 "쇠고기 수입 재협상해야" 80.5%…압도적 여론], SBS, 2008.6.2.</ref> 정부의 대응은 협상에 반대하는 촛불집회를 확대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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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산 참사 ====
{{참조|용산 철거 현장 화재 사고}}
[[2009년]] [[1월 19일]] 오전 5시 33분 용산 4구역 철거민과 전국 철거민 연합회 회원 등 약 30여 명이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강로 2가에 위치한 6층짜리 남일당 상가 건물 옥상을 점거하였으며, 경찰은 경비 병력으로 3개 중대 300여 명을 투입하였다. 검찰의 공소사실에 따르면, [[철거민]]들은 옥상 건물 위에 [[망루]](望樓)를 짓고 충분한 양의 가연성 물질인 [[시너]]를 바닥과 옥상에 준비하였고 [[화염병]]과 돌을 던지며 철거반에 저항하였으며, 경찰은 [[물대포]]를 쏘며 맞섰다.<ref name="time">[http://news.jknews.co.kr/article/news/20090120/7246389.htm '용산 참사' 시간대별 상황] {{웨이백|url=http://news.jknews.co.kr/article/news/20090120/7246389.htm |date=20130927225903 }}, 한국재경신문, 2009년 1월 20일.</ref> 철거민들은 서울시가 최소한의 보상도 없이 철거를 밀어붙이고 있다고 주장하였다.<ref>[http://www.cbs.co.kr/nocut/show.asp?idx=1041452 '화염병 부활' 용산 철거민, 경찰과 격렬대치], 노컷뉴스, 2009년 1월 19일.</ref>
 
[[1월 20일]] 오전 1시 22분, 철거민들이 던진 화염병으로 농성장 옆 상가 건물 [[가림막]]에 [[화재]]가 났으나 40분만에 [[진화]]되었고, 오전 6시 12분에 경찰은 철거민들에게 물대포 살수를 시작하였다.<ref name="time" /> 6시 45분, 경찰은 건물의 옥상에서 농성하던 철거민들을 진압하기 위해 [[컨테이너]]에 [[경찰특공대]]를 태워 옥상으로 올려 보냈으며, 7시에 컨테이너가 옥상으로 올라가자 본격적인 진압이 시작되었다. 7시 20분에 특공대를 실은 두 번째 크레인이 올라가자 3층과 5층에서 불이 났고, 옥상에 있던 망루에도 불길이 번졌다. 7시 30분에서 40분 사이, 5층에서 3명이 불을 피해 창문가로 이동했다. 7시 45분에는 불이 붙은 망루가 무너졌고, 8시 30분에 소방관들이 옥상에 올라가 망루를 해체하였다.<ref>[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34293.html 대책위 발표로 본 '용산 참사' 순간], 한겨레, 2009-01-20</ref> 11시 45분 경찰은 망루를 수색하여 사망자 5명(세입자 2명, 전철연 회원 2명, 경찰특공대 대원 1명)을 발견했으며, 23명(경찰 16명, 농성자 7명)<ref>용산구청 도시계획과에서 집계한 자료에 의하면 경찰 16명, 농성자 7명으로 집계되어 있다.</ref> 이 부상했다고 발표하였다. 12시 20분 농성자 시신 1구가 추가로 발견되었다.<ref name="tim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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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별 사면 ====
이명박은 "부정부패와 함께 갈 수 없다"고 말하는 등 부패문제를 강조해왔으나 각종 부정부패 및 범죄를 저지른 측근 정치인들을 대거 사면복권 시킨 후<ref>{{뉴스 인용|제목 = 李대통령 "부정부패와 함께 갈 수 없다"|url = http://media.daum.net/politics/president/view.html?cateid=100012&newsid=20090419190608122&p=segye|출판사 = 세계일보|저자 = 허범구 기자|쪽 = |날짜 = 2010-04-19|확인날짜 = 2010-05-06}}</ref> [[2008년]] 8월, 8.15 사면을 마지막으로 임기중 사면은 없을 것이라고 거짓 선언 하고<ref name="eto.co.kr">{{뉴스 인용|제목 = 李대통령 "8·15가 마지막… 임기내 범법자 사면·복권 없다" 중대발표|url = http://www.eto.co.kr/?Code=20080812110623247&ts=150300|출판사 = 경제투데이|저자 = 김성덕 기자|쪽 = |날짜 = 2008-08-03|확인날짜 = 2010-04-04|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131003052445/http://www.eto.co.kr/?Code=20080812110623247&ts=150300|보존날짜 = 2013-10-03|깨진링크 = 예}}</ref> 이듬해인 [[2009년]] [[12월 29일]] [[이건희]]에 대해서 대한민국 역사상 유례가 없는 단독 사면을 단행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 = 정부, 이건희 단독 특별사면키로(종합)|url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3046907|출판사 = 연합뉴스|저자 = |쪽 = |날짜 = 2009-12-29|확인날짜 = 2010-04-04}}</ref>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해 이건희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삼성측의 주장을 받아들여 사면 한 것이지만, 정작 이건희는 [[삼성 특검]] 당시 배임, 탈세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았다는 이유로 [[IOC]] 위원 자격을 박탈당해 사면의 명분조차 사라졌으며, 대한민국 재벌 1위 이건희에 대한 특혜라는 비판을 받았다.<ref name="pressian.com">{{뉴스 인용|제목='이건희 IOC위원 복귀'만? IOC는 이건희 징계했다|url=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100209094513&Section=02|출판사=프레시안|저자=|쪽=|날짜=2010-02-09|확인날짜=}}</ref> 또한, 부정 및 비리 혐의로 구속되어 수감중이던 친형 이상득(前국회의원), 최시중(前 방송통신위원장) 및 다른 이명박 대통령의 측근들을 퇴임 한달 여를 앞두고 갑자기 사면하여 지탄을 받기도 했다. 참고로 이 사면을 받기 위해선 刑이 확정 된 이후라야 하는데 이들은 사면 대상에 포함 되기 위해 모두 직전 연말에 항소하지 않고 죄를 인정하는 편법을 저질렀다.
 
==== 권총 협박 사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