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황: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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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이황은 [[1501년]] 경북 안동부 예안현(오늘날의 안동시 예안면) 온계리(溫溪里)에서 진사(進士) [[증직|증]] [[의정부]][[좌찬성]] 이식과 부인 문소김씨(2남 1녀) 춘천박씨(5남)의 7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진보 이씨|진보]](眞寶), [[자 (이름)|자]]는 경호(景浩), [[호 (이름)|호]]는 퇴계(退溪-퇴거계상[退居溪上]의 줄임말, <u>물러나 시내 위에 머무르다</u>는 뜻),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사후 '''이자'''(李子), '''이부자'''(李夫子)로 존숭되었다. 조선 정치사에서 특히 [[동인]]과 [[남인]] 계열의 종주이며 일부 [[북인]]도 그의 문인들이었다.
 
안동부사를 지낸 송재 이우의 조카이자 문하생이다. 이황이 태어날 때 이황의 부모는 태몽을 꾸었는데 이식이 40세 때 진사시에 합격한 해에 어머니의 꿈에 '공자가 대문 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이황을 낳았다하여 대문을 성림문(聖臨門)이라 일컬었다.<ref>[{{웹 인용 |url=http://www.kyobo.co.kr/sabo/sabo7031.html |제목=역사인물 기행:퇴계 이황] |확인날짜=2011-05-28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071107134018/http://www.kyobo.co.kr/sabo/sabo7031.html |보존날짜=2007-11-07 |깨진링크=예 }}</ref>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마흔 살의 나이로 사망하여, 이황은 홀어머니 춘천박씨 밑에서 자라야 했다.
 
형은 온계(溫溪) [[이해(1496년)|이해]](李瀣)로 이해 역시 학자였으나 [[을사사화]]로 희생된다. 가정적으로도 불행하여 일찍이 김해 허씨와 결혼하였으나 27세에 상처하고, 재혼한 안동 권씨 역시 46세에 사망하였으며 둘째 아들과 증손의 요절을 보았다. 상처한 후 우연히 그의 사람됨을 본 권질(權瓆)이 병약한 자신의 딸을 부탁한다고 청하자, 그는 거절하지 못하고 권질의 딸을 받아들였다. 권질의 딸은 정신질환이 있었는데, 후일 20세기의 학자 [[유홍준]]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권씨 부인을 요즘 유행하는 말인 사이코패스를 줄인 사이코라고 표현하였다. 그 외에도 퇴계에게는 첩이 1명 있었으나 첩도 서자 1명을 낳고 일찍 요절하였다. 퇴계는 본부인 허씨 소생 자녀들에게 생모와 계모를 차별하지 말도록 가르쳤고, 이에 권씨 부인이 사망한 뒤에도 자녀들은 권씨 부인의 3년상을 시묘살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