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르차니 페렌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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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재력을 바탕으로 정치활동에 다시 뛰어들어, [[메드제시 페테르]] 총리의 전략 고문이 되었다. [[2003년]] 체육청소년부 장관으로 임명되었고, [[2004년 1월]]에는 [[죄르]]가 포함된 지역의 [[헝가리 사회당]] 위원장을 겸임했다. 그 해 여름, 메드제시 총리와의 불화로 장관직을 사임했으며, 연정이 붕괴되고 메드제시가 사임하면서 헝가리 사회당의 대표로 주르차니가 총리로 선출되었다.
 
초기에는 젊고 개혁적인 인물로 찬사를 받았으며, [[2006년 4월]] 총선에서 사회당을 다시 제1당으로 이끌며 연정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총선 과정에서 위기에 처한 국가 경제에 대해 거짓말을 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그 해 [[9월]]부터 그의 퇴진을 요구하는 대규모 [[2006년 헝가리 반정부 시위|반정부 시위]]가 일어났다.<ref>[http://www.donga.com/fbin/output?n=200609230057 헝가리총리 “거짓말 발언은 과장법”]{{깨진 링크|url=http://www.donga.com/fbin/output?n=200609230057 }} 동아일보 2006년 9월 23일</ref><ref>[http://www.segye.com/Articles/News/International/Article.asp?aid=20060920000503&ctg1=08&ctg2=00&subctg1=08&subctg2=00&cid=0101040800000&dataid=200609201633000156 헝가리 반정시위 확산일로 주르차니 총리 퇴진요구 일축] 세계일보 2006년 9월 21일</ref>
이 시위는 [[2007년]]과 [[2008년]] 초까지 산발적으로 계속되었다. 그는 경제 위기 상황을 타파하기 위한 정책을 내놓았으나, 국민의 반감은 더욱 커지기만 했다. [[2008년 4월]] 연정이 붕괴된 가운데, 그는 [[8월]], 자신의 총리직을 걸고 감세안을 제시하였으나, 의회에서 통과될 가능성이 낮아 사임 가능성이 높은 상태였다.<ref>[http://www.yonhapnews.co.kr/international/2008/08/31/0606000000AKR20080831005000086.HTML 쥬르차니 총리 사임 위기]{{깨진 링크|url=http://www.yonhapnews.co.kr/international/2008/08/31/0606000000AKR20080831005000086.HTML }} 연합뉴스 2008년 8월 31일</ref> 이어 금융 위기에 따른 경제난을 극복하지 못하여 결국 [[2009년]] [[3월 21일]], 사임을 발표하였다.<ref>[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america/345572.html 아이슬란드·라트비아 이어 헝가리 총리도 ‘집으로’ 경제위기로 사임…정국 혼란] 한겨레 2009년 3월 22일</ref> [[3월 28일]], 사회당 당수직도 내놓았으며, [[4월 14일]] [[버르너이 고르돈]]이 후임 총리로 선출되었다.
 
주르차니 총리는 [[2005년 3월]] [[대한민국]]을 방문하여 [[노무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