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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역사학자 Hans Buchheim이 [[프랑크푸르트]]의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기소 측 전문 감정인으로서 활동했던 경험을 담아 1965년에 발간한 에세이 “Command and Compliance”에 따르면, [[아우슈비츠]] 내에서 유대인을 비롯한 수감자들을 살해하는데 있어 가해자들의 자유의지를 침범하는 어떠한 강압적인 명령도 없었다고 한다.<ref name = "Buchheim 1968 372_373">{{Harvnb|Buchheim|1968|pp=372–373}}.</ref> Buchheim은 범죄나 다름없는 그 명령들은 충분히 회피할 기회가 있었다고 저술하며,<ref name = "Buchheim 1968 372_373"/> 이러한 명령을 이행하지 않은 [[친위대 (나치)|SS친위대원]]들이 강제수용소에 수감되거나 처형당했다는 어떠한 증거도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ref>{{Harvnb|Buchheim|1968|p=381}}.</ref> 게다가 [[하인리히 힘러|Heinrich Himmler]]가 그의 대원들에게 ‘모범적이고 예의바른’ 모습을 갖추길 강조한 만큼 SS친위대는 불필요한 가학행위는 오히려 지양하고 있었으며, 가학행위는 그들 중 특별히 잔인한 성향을 지녔거나 [[국가 사회주의]]에 과도한 충성을 증명해보이려는 개인들의 돌출행동 정도로 여겼다.<ref name = "Buchheim 1968 372_373"/> 마지막으로 Buchheim은 결백한 사람들 중 그런 길로 빠져버린 이들 역시 소속감을 유지하기위해, 또는 명령을 거부할 경우 동료로부터 ‘약자’로 취급받지 않기 위해 그러한 선택을 한 것일 뿐 피할 수 없는 명령이 아니었다고 주장한다.<ref>{{Harvnb|Buchheim|1968|pp=386–7}}.</ref>
 
1992년에 발간된 홀로코스트 사학자 Christopher Browning의 저서 “Ordinary Men: Reserve Police Battalion 101 and the Final Solution in Poland”에서 그는 유대인들을 체포하고 학살하며 수용소로 이송하던 임무를 수행한 경찰조직을 다뤘다. 101부대라 불린 이 경찰조직의 대원들은 대부분이 병역에 부적합한 [[함부르크]] 노동계급 출신의 동향 중년 남성들로, 학살에 대한 어떠한 교육도 받지 않았었다. 그리고 부대의 지휘관은 학살임무가 주어지면 이에 대해 불쾌감을 가지는 부대원들에게는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않을 선택권을 주었다. 대신에 학살현장통제와 저지선형성 등의 간접적인 작업에만 참여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500여명의 부대원 중 15명 미만의 대원만이 이를 선택하였고 절대다수는 학살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ref>{{Harvnb|Browning|1992|p=57}}.</ref>
5월에는 [[비아위스토크]] 게토에서, 같은 해 9월에는 [[빌뉴스|빌나]] 게토에서 단기간 봉기가 발생했다.
 
그 외에 가장 유명한 저항사례로는 [[바르샤바 봉기]]가 있다. 1944년 8월 1일부터 2달간 지속된 이 봉기는 Tadeusz Bór Komorowski 장군에 의해 주도되어 하루만에 바르샤바를 점령하고 해방지구를 형성하는데에 이르렀다. 하지만 또다른 대규모 봉기를 우려한 [[하인리히 힘러|Heinrich Himmler]]에 의해 강경진압이 결정되어, 봉기군 전원과 더불어 20만명에 가까운 시민이 학살되었다. 결국 바르샤바는 1943년의 게토 봉기와 1944년의 무력봉기를 거치면서 초토화되었다.
 
[[파일:Bundesarchiv Bild 101I-267-0111-36, Russland, russische Kriegsgefangene (Juden).jpg|섬네일|170px|독일군에 붙잡힌 유대계 소련군 전쟁포로, 1941.8월<br />대전중 50만명에 가까운 유대인들이 소련군으로 복역했다.]]
동유럽에서는 약 2~3만의 유대인이 나치와 그 동맹들을 상대로 [[파르티잔|Partizan]]으로서 활발하게 활동했고,<ref>{{Harvnb|Kennedy|2007|p=780}}.</ref><ref name=USHMM_RES>[http://www.ushmm.org/education/foreducators/resource/pdf/resistance.pdf "Resistance During the Holocaust"]. ''Holocaust Encyclopedia''. United States Holocaust Memorial Museum. Retrieved 27 September 2012.</ref> [[리투아니아]]에서만 3천이 넘는 독일군이 이들에게 사살되었다. 이들은 주로 게릴라전과 함께 독일군 기반시설에 대한 [[사보타주|Sabotage]]를 벌였고, 이따금 게토의 봉기를 유도하거나 수용소의 탈출을 돕기도 하였다. 특히나 유대인 비중이 높은 리투아니아와 [[벨라루스]]에서는 집단학살 수용소의 비극에서 수천명의 유대인들을 구출하기도 했다. [[암스테르담]]을 비롯한 네덜란드 전역에서도 활발히 게릴라를 벌였고 수많은 유대인들이 Dutch네덜란드 Resistance에레지스탕스에 가담하여 활동했다.<ref>{{Harvnb|Klempner|2006|pp=145–146}}.</ref>
 
프랑스에서 유대인들은 저항군 참여 뿐 아니라 유대 공동체의 자체 저항조직에서도 활발히 활동했었다. 유대인 생존자들은 대부분 [[레지스탕스 운동|French프랑스 Resistance레지스탕스]]로서 나치와 [[비시 프랑스|Vichy비시 괴뢰정부]]에 맞서 게릴라전을 벌였다. 이들의 참여율과 적극성은 상당히 높아서 당시 프랑스에서 유대인 비율은 1%가 채 안되었음에도 [[레지스탕스 운동|French프랑스 Resistance레지스탕스]]의 유대인 비율을 20%에 육박할 정도였다.<ref>{{Harvnb|Suhl|1987|pp=181–3}}.</ref> 유대인 청년조직이었던 EEIF는 Vichy비시 괴뢰정부에 의해 해산되자 그대로 Resistance레지스탕스 조직에 흡수되어 정보와 자금지원을 담당했다. [[시오니즘|Zionist시오니스트]]들 역시 Armee Juive를 결성하여 나치의 유대인 체포와 강제이송을 방해하고 국외로 탈출하는 작업을 수행했다. 위 두 조직은 1944년에 연합하여 [[파리 (프랑스)|파리]], [[리옹]], [[툴루즈]], [[그르노블]], [[니스 (프랑스)|니스]]의 해방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ref>{{Harvnb|Zuccotti|1999|p=274}}.</ref>
 
{{인용문|많은 사람들이 유대인들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죽음 앞에 소극적이었다고 생각하지만, 제가 아는 한 이는 절대 사실이 아닙니다. 저는 수많은 유대인들과 함께 레지스탕스 활동을 했고, 그들은 언제나 저보다 위험한 임무들을 도맡아 수행했습니다.|Pieter Meerburg, 레지스탕스 생존자<ref>{{Harvnb|Klempner|2006|p=145}}.</ref>}}
 
특이하게도 영국군에는 5천명의 팔레스타인 출신 유대인들이 모여 The Jewish Brigade을 결성하기도 했고, 독일어에 능통한 이들은 Special Interrogation Group에 자원하여
서부사막 전선 최전방에서 독일군에 [[사보타주|Sabotage]]나 특공작전을 벌였다.
 
====- 수용소 폭동과 탈출 시도====
 
1943년 5월 [[트레블링카 강제 수용소|트레블링카 수용소]]에서 200명이 탈출하면서 어수선해진 수용소 내부에서 폭동이 발생했다. 이때 상당수의 독일군 간수가 살해‧제압되고 수용소 건물들이 불에 탔지만 수감자 900명이 사살됐고, 600여명이 탈출에 성공했지만 이중 40명만이 종전의 기쁨을 맛볼 수 있었다.
1943년 8월, 소련군 전쟁포로를 포함한 600여명의 유대인 수감자들이 소비버(Sobibór) 집단학살 수용소에서 탈출을 시도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로 인해 11명의 [[친위대 (나치)|SS대원]]과 수많은 간수들이 사망했고, 발각되고 나서는 중화기까지 동원한 수용소 측의 공격으로 300명의 수감자가 사살되었다. 그나마 탈출한 인원의 대다수도 수용소를 둘러싼 지뢰밭을 통과하진 못하고 폭사하거나 사살되었다. 이들 중 60여명만이 탈출에 성공하여 소련의 [[파르티잔|Partizan]]에 합류했다.
1년 뒤, 1944년 8월 7일에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250명의 Sonderkommando들이 간수들을 공격하고 여성수감자들이 인근 공장에서 밀입해온 폭약으로 4번 화장터를 폭파하는데 성공한다. 3명의 간수가 살해되었고 이중 하나는 오븐 속에 구겨진 채 발견되었다. Sonderkommando들은 이어서 바로 탈출을 시도했지만 곧 전원 사살되었다.
 
사실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저항활동과는 관련이 없는 수동적인 태도를 보였었지만, 그들 역시 강제이주라는 명분에 순순히 응하기보다는 탈출과 협상, 공무 방해와 때때로는 뇌물까지 제공하면서 저항정신과는 별개로 나치독일의 유대인 사냥을 지연시켰다.
 
하지만 나치와 [[제국보안본부|RHSA(국가보안본부)]]는 이들의 순종과 수동성을 노리고, 오히려 유대 공동체가 자체적으로 구성원들의 복종을 강제하게 유도했다. 이 계획의 대표적인 타겟조직이 독일의 Reichsvereinigung der Juden(라이히 유대인 정부)와 폴란드 게토의 Judenräte(유대 의회)였다. 나치는 이들에게 유대인 권익보호와 [[시오니스트|Zionist]]에 대한 지원책 등 거짓 공약을 제시해, 이들의 협조를 얻는 데 성공했다. 결국 이 두 공동체는 유대인들에게 라이히 정부(나치독일 정부)에 대한 순종과 협조를 강권하여, 도피에 전념하던 유대 사회에 혼란을 가중하고 희생자를 더욱 불리는 결과를 낳게 된다.
 
:"유대인들은 2천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박해받으며, 저항은 구원이 아닌 죽음을 몰고 온다는 냉혹한 현실에 부딪혀 왔다. 이러한 역사의 반복 속에서 그들의 논리와 전승, 문화와 사회구조, 언어까지도 타협과 설득, 애원으로 가득차게 되었고 거기에 저항과 대결의 자리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1942년 6월,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암살되었고 그 뒤를 이어 [[친위대 (나치)|SS소속]] 장성인 [[에른스트 칼텐브루너]]가 [[제국보안본부|RHSA(국가보안본부)]]의 수장이 되었다.
[[하인리히 힘러]]의 감수 아래, 그는 Final최종 Solution해결법(유대인 말살계획)을 착실히 전개해나가며 1943년부터 1년간 독일의 영향권 아래에 있는 모든 유대인들을 체포하여 수용소로 보내는 데 전념했다. 유대인 학살이 절정에 달했던 1944년 봄,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에서는 하루에 8천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ref>[http://www.ushmm.org/wlc/en/article.php?ModuleId=10007327 "Killing Centers"]. ''Holocaust Encyclopedia''. United States Holocaust Memorial Museum. Retrieved 27 September 2012.</ref>
사실 나치 정부의 일반 부문 중 유대인 [[게토]]의 강제노동에 기반한 군수산업의 생산성은 손에 꼽을 정도로 높은 편이었다. 하지만 Final Solution의 실행으로 인해 1943년 모든 게토의 생산은 중단되고 유대인들은 집단학살 수용소로 보내지게 되었다. 이 일환으로 1943년 초, 바르샤바 게토에서 1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강제 이송되어 학살되었고 이로 인해 바르샤바 게토 봉기가 발생했지만 무자비하게 진압되었다.
1943년 11월 3일 단 하루만에, 마이다네크(Majdanek) 수용소와 인근 캠프들에서는 추수감사 작전(Aktion Erntefest)라는 이상한 작전명 아래 4만2천명에 달하는 유대인들이 사살되었다. 러시아 점령지에서 잡힌 유대인들도 실려오는 족족 그 자리에서 사살한 이 작전은, 나치독일이 자행한 최대의 유대인 단일 학살작전로 기록되었다.<ref>[http://www.ushmm.org/wlc/en/article.php?ModuleId=10005222 "Aktion 'Erntefest' (Operation 'Harvest Festival')"]. ''Holocaust Encyclopedia''. United States Holocaust Memorial Museum. Retrieved 27 September 2012.</ref>
[[파일:Bundesarchiv Bild 101I-680-8285A-08, Budapest, Festnahme von Juden.jpg|섬네일|1944.8.20-22, 헝가리 부다페스트.<br />붙잡힌 유대인 여성들]]
 
독일에서 유대인 수송차량은 철로 상에서 가장 우선권을 가졌었다. 심지어 1942년 끝자락에 [[스탈린그라드 전투]]로 지독한 소모전이 벌어지고, 기반시설과 철도에 대한 연합군의 폭격이 가중되던 시점에도 이 철칙은 지켜졌다. 이 때문에 군수품의 우회와 연착이 빈번하게 발생해 육군 사령관들의 빈축을 사기도 했다. 물론 숙련된 유대인 기술자들과 고학력자들이 처형이 예약된 상태로 이 차량들 속에 실려있었기 때문에 경제 부처와 경영인들의 눈길도 고울 순 없었다. 더군다나 전쟁이 막바지에 치닫을 수록 패전의 기색이 역력해졌기 때문에, 사실상 나치의 광신도가 아니라면 누구나 전후 전범처리에 대해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아돌프 히틀러]]의 권한을 쥐고 흔드는 [[하인리히 힘러]]와 강력한 [[SS]]의 억제력 때문에, 기본적인 군사적, 경제적 우선순위 따윈 안중에도 없는 Final최종 Solution를해결법을 지켜보면서도 정작 반발을 표하는 사람은 없었다.
 
당시 [[히믈러]]가 얼마나 이 소명에 미쳐있었는지는 나치 고위당원들의 공식 집회에서 한 연설의 녹취록 일부를 보면 알 수 있다.
[[파일:Bundesarchiv Bild 183-N0827-318, KZ Auschwitz, Ankunft ungarischer Juden.jpg|섬네일|1944,봄. 체코 동부에서 붙잡혀 아우슈비츠로 보내진 유대인 여성과 아이들]]
 
이 모임에는 해군 제독 [[카를 되니츠]]와 전시 군비 장관 [[알베르트 슈페어]]도 참석했었다. 이들 중 [[되니츠]]는 전후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파이널 솔루션|최종 해결법]]이라는 계획의 존재 자체도 모르고 있었다고 주장했고, 이는 재판에서 인정 되었다. 재판이 벌어지던 당시에는 [[히믈러]]의 녹취록의 존재는 아무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Speer는슈페어는 재판과 뒤이은 인터뷰에서 “만약 제가 모르는 사건이 있었다면, 그것은 제가 보지 못한 게 아니라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겁니다.”<ref>{{Harvnb|Fest|1999|p=329}}.</ref>라고 선언했다.
 
1944년 봄, 폴란드의 게토들이 공터가 되기 시작해서야 학살의 규모도 줄어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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