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익 파시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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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말, 하버마스는 돌연 [[프랑크푸르트 대학]] 교수직을 던져 버리고, [[스타른베르크]] 호숫가 근처에 있는 [[막스플랑크 연구소]]로 자리를 옮겼다. 그가 대학을 떠난 데에는 [[1960년]]대 말부터 격렬해진 [[서독]]내 학생 운동 세력과의 갈등이 배경이 되었다.<ref name="ahn410">안광복, 처음 읽는 서양철학사 (웅진지식하우스, 2007) 410페이지</ref> 그는 일부 학생운동가들의 과격 시위와 목적달성을 위해 누군가를 이용하거나, 반대파에게 무자비하게 대응하는 것을 보고 좌익 파시즘을 언급하기 시작한다.
 
그는 학생들의 폭력적인 시위를 [[마조히즘]]이라 비난하고, 학생운동을 좌익 파시즘이라고 맹렬하게 공격했다. 그는 이내 극렬 학생운동권들의 적이되었다적이 되었다. 이들에게‘부르주아 반동 지성인'(의 한사람)으로 매도당하는 현실에서 하버마스는 더 이상 대학에 머물며 학생들과 입씨름하고 싶지 않았다.<ref name="ahn410"/> 그때부터 하버마스는 연구소에 파묻혀 10여 년간 오직<ref name="ahn410"/> 연구와 저술에만 몰두했다. 그의 '의사소통 행위 이론'은 이후 오랜 세월의 사색과 탐구를 거쳐 탄생했다.<ref name="ahn411">안광복, 처음 읽는 서양철학사 (웅진지식하우스, 2007) 411페이지</ref> 하버마스에 대한 극우 진영의 공격과는 별도로 좌익, 학생운동권 진영의 비판 문제는 곧 자신들의 잘못에 대한 비판을 수용하지 않는다는 좌익, 운동 진영의 편협성이 지적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후 [[프랑스]]에서도 비슷한 무렵, 비슷한 논란이 제기되어 좌파적 파시즘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