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도 기미야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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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에는 부상으로 인한 전력 이탈이 있어서 시즌 성적은 7승에 그쳤지만 팀은 다이에가 구단을 인수한 이후 처음이 되는 A클래스(1위 ~ 3위) 진입에 성공하여 [[오릭스 버펄로스|오릭스 블루웨이브]]와 공동으로 3위를 차지했다(당시 다이에와 오릭스의 시즌 승률은 5할). 구도 자신도 세이부 시절이던 1994년 이후 4년 만에 A클래스를 경험했다.
 
이듬해 1999년에는 구도가 에이스로서 11승을 올리는 등 통산 네 번째가 되는 최우수 평균 자책점과 통산 두 번째인 최다 탈삼진 타이틀을 연거푸 획득했다. 다이에가 [[후쿠오카 시후쿠오카시|후쿠오카]]로 연고지를 이전한 이후 첫 리그 제패에 큰 공헌을 하여 시즌 MVP에 선정됐다. 주니치와 맞붙은 [[1999년 일본 시리즈|일본 시리즈]]에서는 1차전에 선발 등판해 일본 시리즈 신기록이 되는 13개의 삼진을 빼앗아 완봉승을 거둔 이 경기에서 자신의 일본 시리즈 통산 탈삼진수를 86으로 늘렸고, [[이나오 가즈히사]]가 갖고 있던 기록(84개)을 넘어섰다.<ref>{{웹 인용|url=https://www.nishinippon.co.jp/hawks/article/369088/|title=コメントで読む99年ダイエー日本一 痛めた脚でスーパージャンプの秋山は…|publisher=니시닛폰 스포츠|date=2017-10-27|accessdate=2017-10-29}}</ref> 주니치의 [[호시노 센이치]] 감독은 “적을 칭찬하는 것은 싫지만, 구도는 우리 팀을 0점으로 막아냈기 때문에 굉장한 투수다”라고 분한 감정을 드러내며 말했다. 구도 자신은 훗날 자신의 저서에서 이 경기의 투구를 “생애 최고의 경기였다”라고 평가하며 삼진을 빼앗은 것과 땅볼을 치게 하는 것도 자신이 생각했던 대로였다고 밝혔다. ‘주니치가 압도적으로 유리하다’라는 하마평 속에서 구도의 완봉승으로 기세를 탄 다이에는 4승 1패의 성적으로 일본 시리즈 정상에 올랐고 구도 자신도 일본 시리즈 우수 선수로 선정됐다.
 
시즌 종료 후 FA를 선언해 한때는 주니치 드래곤스나 메이저 리그 이적에 얽메였다는 언론 보도가 있었지만<ref>[https://web.archive.org/web/20010218044222/http://www.mainichi.co.jp/suponichi/archive/199911/1125-sportsnews1.html {{lang|ja|工藤 巨人消した?}}] - 마이니치 인터랙티브(마이니치 신문), 2001년 2월 18일</ref> 최종적으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이적이 결정됐는데 4년 계약을 포기하고 단년 계약을 맺었다.<ref>[https://web.archive.org/web/20010217170156/http://www.mainichi.co.jp/suponichi/archive/199912/1215-sportsnews1.html {{lang|ja|工藤 引退覚悟契約}}] - 마이니치 인터랙티브(마이니치 신문), 2001년 2월 17일</ref> FA에 대해서는 “(다이에에서)좀더 있고 싶었다”라고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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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에는 9승을 남기면서 팀의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친정팀 세이부와 맞대결을 펼친 [[2002년 일본 시리즈|일본 시리즈]]에서는 3차전에 선발로 나오면서 첫회에 [[알렉스 카브레라]]에게 선제 적시타를 맞았지만 3회 이후에는 무안타로 막아내면서 8이닝 동안 2실점 8탈삼진의 호투를 보였다. 팀은 그대로 이기면서 자신도 승리 투수가 됐고 자신이 가진 일본 시리즈에서의 탈삼진 일본 신기록을 102까지 늘렸다. 2003년에는 부상으로 전력에서 이탈한 적도 있어 7승 6패와 평균 자책점 4.23의 성적으로 끝났다.
 
2004년 8월 17일,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야쿠르트 스왈로스]]와의 경기에서전에서 2실점 완투 승리를 거두며 개인 통산 200승을 달성했다. 일본 프로 야구 역대 23번째이자, 41세 3개월에서의 200승은 당시로서는 사상 최고령 기록이다. 또한 이 경기에서 프로 첫 홈런을 기록했는데 41세 나이에 프로 생활 23년 만에 첫 홈런을 때린 것 또한 일본 프로 야구 사상 최고령 기록이다. 단지 타자로서는 2000년부터 2002년까지 84타석 연속 무안타라는 센트럴 리그 기록을 남겼다(일본 기록은 [[사가 겐시로]]의 90타석). 자신의 저서에서 “예전 일본 시리즈에서 생긴 이미지가 있는 탓인지, 요미우리로 이적했을 때 ‘배팅도 기대하겠어’라는 얘기를 들었으나 중간부터 ‘배팅은 이제 됐으니 번트만 확실하게 쳐달라’라는 말을 듣게 됐다”라고 밝혔다. 그 해에는 평균 자책점이 4점 대이면서도 4년 만의 두 자릿수 승리를 거두었다.
 
2005년 5월 19일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와의 경기에서 센트럴 리그 최고령 완투승리 기록(당시)을 경신했고 같은 해 8월 26일 [[한신 타이거스]]와의 경기에서는전에서는 최고령 두 자릿수 승리 기록(당시)을 경신했다. 2015년 현재는 최고령 200승을 비롯해 모두 [[야마모토 마사]]가 기록을 경신하고 있다. 이 해에는 팀이 개막 이후부터 침체를 겪었고 구원 투수진 역시 부진을 보였다. 선발진에서는 베테랑 [[구와타 마스미]]는 이 해에 단 한 번도 승리를 올리지 못했고 에이스인 [[우에하라 고지]]는 컨디션에 기복을 보였으며 [[다카하시 히사노리]]도 과거 2년 만큼 부진을 겪진 않았으나 기복이 극심할 정도의 침체를 겪었다. 우에하라와 다카하시 히사노리는 규정 투구 이닝을 채웠지만 두 자릿수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이 해에 구도는 11승을 올렸지만 규정 투구 이닝에는 도달하지 못했고 팀 투수진 가운데 규정 투구 이닝을 채웠음에도 두 자릿수 승리를 거둔 투수는 없었다.
 
이듬해 2006년에는 시즌 전반기에 3승을 올렸고 7월에는 [[오노 유타카]]를 뛰어넘으며 프로 야구 사상 최초로 43세 2개월 이상의 현역 좌완 투수가 됐다. 하지만 6 ~ 7월 두 경기에서 총 20실점을 기록했고 더 나아가 어깨 통증도 발병하여 1군 등록이 말소됐다. 최종적으로 3승 2패, 평균 자책점 4.50의 성적으로 시즌을 마쳤다. 12월에 있은 재계약 협상에서 한도폭을 넘는 연봉 삭감 제시를 받고 보류했는데 해를 넘겨서 전지훈련지인 미국으로 출국했다. 오프에는 요미우리의 젊은 유망주 3명([[아이다 유시]], [[야마구치 데쓰야]], [[기무라 쇼타]])을 애리조나 자율 훈련에 대동시켜 프로로서의 사생활이나 트레이닝의 중요함을 처음부터 지도해나가며 재능을 향상시켰다. 이 자율 훈련 기간 중에 [[가도쿠라 겐]]이 FA로 이적했던 것에 따른 인적 보상으로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요코하마 베이스타스]] 이적이 결정됐다.
 
=== 요코하마 시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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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에서는 트레이드 당시 구도와 함께 요코하마로 이적한 [[니시 도시히사]]와 함께 요미우리와의 ‘인연의 대결’로 기대를 모았으나 1월 11일에 방송된 [[보도 스테이션]]과의 인터뷰에서 “내가 프런트였다면 43세의 선수를 보호 범위에는 넣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하여 자신이 소속된 구단의 팀 사정에 이해한다는 모습을 보였으며, “날 원한다고 해준 구단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요코하마 구단에는 “밝은 이미지를 가진 구단이다. 단순히 공을 던지는 것 이상의 팀을 공헌하고 싶다”라는 각오를 밝혔고 “훈련지에서 [[마크 크룬|크룬]]을 만났다”며 팀 동료들에 대한 메시지를 보냈다. 2007년 1월 19일에 가진 입단 기자회견에서 “하마({{lang|ja|ハマ}})의 뭐라고 불리고 싶으냐”라는 [[도쿄 방송 홀딩스|TBS]] 아나운서인 아오키 유코의 질문에 대해 “그러면 하마의 아저씨가 좋겠다”라며 장난기 가득한 어조로 대답했다. 연봉은 전년도 2억 9,000만 엔에서 2억 엔이 삭감된 9,000만 엔(여기에 최고 5,000만 엔의 성과급)으로 프로 야구 사상 최대 감봉액(당시)이 됐다(금액은 추정치).
 
2007년 4월 1일, 요미우리와의 경기에요미우리전에 등판하여 1군에서의 실제로 뛴 통산 경력이 26년에 달하면서 [[노무라 가쓰야]]가 세운 프로 야구 최장 기록에 어깨를 나란히 했다. 그러나 시즌 개막 초에는 불안정한 투구가 눈에 띄면서 3연패를 당하는 등 스스로 2군행을 지원하여 조정에 들어갔고 5월 11일 히로시마전에서 9회에 구원 등판하여 1군에 복귀했다. 구원으로 등판한 것은 9년 만의 일이다. 5월 23일 세이부와의 경기에세이부전에 선발 등판하여 승리 투수가 됐는데 [[요네다 데쓰야]]가 수립한 22년 연속 승리 기록을 경신하고 23년 연속 승리를 달성했다. 또, 44세 넘은 선수가 승리 투수가 된 것은 역대 두 번째 기록이다.
 
2007년 7월 12일 주니치와의 경기에서주니치전에서 6회말에 [[나카타 겐이치]]로부터 중전 안타를 날려 44세 2개월의 나이로 센트럴 리그 최고령 안타 기록을 수립했다. 더 나아가 9월 26일 한신과의 경기에서한신전에서 5회말에 [[하시모토 겐타로]]로부터 좌전 안타를 날리는 활약을 보이며 44세 4개월에 자신의 기록을 경신했다.<ref>프로 야구 기록은 1950년 9월 28일, [[오릭스 버펄로스|한큐 브레이브스]]의 [[하마자키 신지]]가 [[다이에이 유니온스]]와의 경기에서 기록한 48세 9개월이다.</ref> 7월 24일 요미우리와의 경기에요미우리전에 선발 등판하여 승리 투수가 되면서 사상 최초로 [[오사카 긴테쓰 버펄로스|긴테쓰]]를 비롯한 전체 13개 구단으로부터 승리를 거둔 투수가 됐다. 개막 당초에는 실투를 하는 등의 부진으로 2군에 내려가는 수모를 겪었지만 1군에 복귀한 이후에는 안정된 투구를 계속 보여줬다. 시즌 종료 후에 있은 재계약 협상에서 2,000만 엔이 상승한 연봉 1억 1,000만 엔으로 재계약을 맺었다.
 
이듬해 2008년 4월 1일 야쿠르트와의 경기에야쿠르트전에 선발 등판하여 프로 통산 27년이 됐는데 노무라의 프로 통산 26년을 경신하여 역대 단독 1위가 됐지만 팔꿈치 통증으로 인해 이 한 경기만으로 2군에 내려갔다. 9월 9일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닛폰햄]] -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 (2군)|쇼난]]([[파이터스 스타디움|가마가야]]) 16차전에 선발로 나와 5이닝을 던져 [[이스턴 리그 (일본)|이스턴 리그]] 최고령 승리 투수가 됐다. 하지만 1군에서는 단 1승도 거두지 못했고 1984년 이래 24년 만에 1군에서의 단 한 번도 승리 투수가 되지 못한 채로 시즌을 마쳤다. 같은 해 재계약 협상에서 야구 협약에 정해져 있던 감액 제한을 넘어선 약 55%나 감소된 연봉 5,000만 엔 플러스 실적에 따른 지급으로 갱신했다.
 
2009년에는 대명사가 된 등번호 47번을 착용했던 햇수가 26년에 달하면서 프로 야구 신기록이 됐다. 4월 8일에 친정팀인 요미우리와의 경기에요미우리전에 선발 등펀하여등판하여 자신이 갖고 있던 프로 통산 기록을 28년으로 경신했다. 이 경기에서는 8실점을 내주며 패전 투수가 되면서 그 후 2군에서의 조정을 거친 뒤 팀의 방침에 따라 구원 투수로 전향했다. 구도가 본격적으로 구원 투수가 된 것은 1989년 이래 20년 만이었다. 5월 5일 요미우리와의 경기에서요미우리전에서 자신의 첫 [[홀드 (야구)|홀드]]를 기록했다.
 
같은 해 5월 25일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와의 경기에서는전에서는 팀의 4번째 투수로서 9회초에 등판하여 무실점으로 호투했고 팀이 역전 끝내기 승리에 의해 자신이 갖고 있던 44세 4개월에서의 센트럴 리그 최고령 승리 기록을 46세 20일로 경신했다. 이 승리로 통산 223승이 되면서 [[무라야마 미노루]]를 넘는 단독 13위가 됐다. 또 40세 이후 37승째가 되면서 36승으로 어깨를 나란히 했던 [[와카바야시 다다시]](당시 [[지바 롯데 마린스|다이마이 오리온스]] 소속)를 넘는 단독 1위가 됐다. 7월 1일 야쿠르트와의 경기에서야쿠르트전에서 1대 2로 뒤지고 있던 6회초 2사부터 등판하여 타자 1명을 불과 4개로 막아냈고 그 후 팀이 역전하면서 9대 5로 승리했기 때문에 통산 224승째를 올렸다. 이 경기는 지방에 소재하고 있는 [[야마나시 현야마나시현 고세 스포츠 공원 야구장|야마나시 고세 구장]]에서 열렸기 때문에 팬서비스도 겸해서 등판한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이것이 프로 생활에 있어서의 마지막 승리가 됐다. 9월 15일, 팀의 미래를 위해서 젊은 선수들의 기용을 도모했던 구단 본부로부터 전력외 통보와 자유 계약이 되는 취지의 통보를 받았다. 현역에서 계속 뛰겠다는 의사를 나타내면서 친정팀인 세이부가 영입 의사를 나타냈다.
 
=== 세이부로 복귀 ===
2009년 11월 14일, 구도는 “가족 회의 결과, 세이부에서 신세를 지는 일로 결정했다”고 밝히면서 16년 만에 친정팀 세이부로 복귀하게 됐다. 프로 데뷔 이래 거의 해마다 착용했던 등번호 47번은 주축 좌완 투수였던 [[호아시 가즈유키]]가 착용했다. 호아시는 “(등번호 47번은)원래 구도 선배의 번호였다. 구도 선배가 원한다면 기꺼이 돌려 드리겠다”라는 의향을 내비쳤지만 구도 본인이 “젊은 선수한테 그런 신경을 쓰게 하고 싶진 않다”라고 말해 이를 고사했다.<ref>[https://web.archive.org/web/20100315213921/http://www.sanspo.com/baseball/news/091114/bsg0911140506000-n1.htm {{lang|ja|工藤、西武入りへ!背番「47」は辞退}}] - 산케이 스포츠, 2009년 11월 14일</ref> 11월 16일에 등번호는 ‘55’번으로 정했다.<ref>[https://web.archive.org/web/20100123101142/http://www.sanspo.com/baseball/news/091116/bsg0911161803004-n1.htm {{lang|ja|「ゴーゴーで『55』に」古巣復帰喜ぶ工藤}}] - 산케이 스포츠, 2009년 11월 16일</ref>
 
이듬해 2010년 7월 18일, 전반기 종료 직전에 복귀 후 처음으로 1군에 등록됐다. 7월 20일 소프트뱅크와의 경기소프트뱅크전([[후쿠오카 돔|야후 돔]])에서 7회말에 선발 [[노가미 료마]]의 뒤를 이어 팀의 두 번째 투수로 등판, 자신이 가진 프로 통산 기록을 29년으로 경신했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10경기에서 0승 2패, 평균 자책점 10.50의 성적을 남겼고 8월 25일 [[지바 롯데 마린스]]와의 경기에서전에서 동점인 상황에 등판 기회를 얻었으나 역전타를 허용하여 28일에 1군 등록이 말소됐다. 9월 27일에 구단으로부터 전력외 통보를 받고 10월 1일에 퇴단했다.<ref>[http://www.asahi.com/sports/baseball/npb/news/TKY201009270292.html {{lang|ja|西武・工藤に戦力外通告 最年長47歳、現役続行の意志}}] - 아사히 신문, 2010년 9월 27일</ref>
 
=== 세이부 퇴단 후·은퇴 표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