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도 대첩"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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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2=[[파일:Wachigai.svg|17px]] [[와키자카 야스하루]]<br />[[파일:Wachigai.svg|17px]] 와키자카 사헤에{{KIA}}<br />와타나베 시치에몬{{KIA}}<br />마나베 사마노조{{KIA}}
|병력1=전선 96척 (거북선 3척,판옥선 52척 포함) 수군 1만 노꾼 1만
|병력2=전선 73척 (아다케부네 36척, 세키부네 24척, 고바야부네 13척)<br />전투원과 노군 포함 수군 71,100여 명000여명
|사상자1= 전선파손없음. <br />3명 전사, 10여 명 부상.<ref>[http://www.choongmoogongleesoonsin.co.kr/sub_04/sub_04_02_02.asp?boardidx=25&strPage=1&boardtype=33 "임진장초", 이순신, 충무공]</ref>
|사상자2=지휘관 부상, 병력 약 6,500명 내외의 사상자<ref>1척당 아타케부네(170명)와 세키부네(90명)의 정원을 기준으로 격침된 전선 수에 곱하여 계산됨.</ref>, 47척 침몰, 12척 나포<br />총 59척 전선 상실, <br />마나베 사마노조 할복(자살)
이에 이순신은 7월 5일([[양력 8월 11일]]),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함께 전라 좌, 우도의 전선 48척을 본영이 있는 여수 앞바다에 집결시켜 합동훈련을 실시하였고, 다음 날인 6일에 이억기와 더불어 48척을 거느리고 출진하였고, 노량에서 경상우수사 [[원균]]의 함선 7척이 합세하여 조선 수군의 전력은 55척이 되었다. 7월 7일([[양력 8월 13일]]) 저녁, 조선 함대는 당포에 이르러 정박하였다. 이때 목동 김천손(金千孫)에게서 일본의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함대 73척(대선 36척, 중선 24척, 소선 13척)이 견내량(見乃梁 : 거제시 사등면 덕호리)에 들어갔다는 정보를 접했다.
 
한국에서는 한산도 해전에서 일본의 피해를 6,000명 이상으로 잡고 있지만, 어떠한 확인된 정보도 근거도 없다.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일본에서 3만석의 영주로, 한번에 이끌 수 있는 병력이 2,000명을 못 넘는 영주로 용인 전투에서 80,000명의 남도근왕병을 격파할때 역시 2,000명도 안되는 병력이었다.
견내량파왜병장 보면 한산도해전 당시 일본 수군은
전선 73척 : 아다케부네 36척, 세키부네 24척, 고바야부네 13척이며, 아다케부네는 전투원 60명, 노꾼 80명, 대포 3문, 철포병 30명이며, 세키부네는 전투원 30명 노꾼 40명 대포 1문 철포병 20명, 고바야부네는 전투원 10명, 노꾼 20명, 철포병 8명이다. 그리하여 일본 수군은 7110명이 선을 넘을 수 없었다.
 
== 경과 ==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뒤에서 독전하다가 전세가 불리해지자, 패잔선 14척을 이끌고 김해 쪽으로 도주했다. 이 해전은 조선수군의 큰 승리로 막을 내렸다. 격전 중 조선수군의 사상자는 있었으나 전선의 손실은 전혀 없었다. 왜병 400여 명은 당황하여 한산섬으로 도주했다가 뒷날 겨우 탈출하였다.
 
일본의 전선들은 판옥선에 비해 급격한 회전이 어려웠고(따라서 후방은 비워져 있었지만, 쉽게 도망갈 수 없었다)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함대의 정면에 배치된 함선은 많은 피해가 우려되었지만, 조선 함대는 압도적인 화포의 화력으로 이 불리한 점을 극복하였다. 격침되거나 나포된 일본 함선은 모두 총 59척이었고, 병력 4~5000명(고려선전기 등을 토대로 마치 한산해전에 1500명이 참전했다는 식으로 곡해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어떤 일본 사료에도 그러한 말은 없다59척이었다. 아다케급 함선부터가 7척 참여했는데 1500명이 참전했다는 것은 너무나 큰 무리수이다.) 중 상당수가 전사했으며, 한산도로 도망친 와키자카 휘하의 병력 400여 명(이순신이 조정에 올린 《견내량파왜병장》에는 400명, 《와키자카기》에는 200여 명)은 군량이 없어 13일간 해초를 먹으며 무인도에서 떠돌다 뗏목으로 겨우 탈출하였다. 마나베 사마노조는 이때 자신의 배가 소각되자 섬에서 할복하였다.
 
이 전투는 행주대첩과 진주성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때의 3대 대첩의 하나로 불리며, 이순신은 그 공으로 정헌대부(正憲大夫), 이억기와 원균은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승서(陞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