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애 ==
원래 진류에서 살았으나, [[원소 (후한)|원소]](袁紹)를 섬긴 7촌 족숙 [[고간 (후한)|고간]](高幹)의 초청에 응하여 일족을 이끌고 [[병주(幷州)]]로 가 그에게 몸을 의탁하였다이주하였다. 당시 고유의 부친인 고정(高靖)은 촉군도위(蜀郡都尉)[[촉군]][[도위]]였는데, 부친이 촉(蜀)에서임지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고유는 3년에 걸쳐 익주(益州)로 가찾아가 부친의 시신을 모셔왔다.
[[조조]](曹操)가 원씨(袁氏)의 세력을 흡수한 후, 고유는 관현장관[[현령|장]](菅縣長)에 임명되어 치적을 쌓았다. 고간에 조조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고유는 고간을 따르지 않고 조조에게 갔다. 조조는 어떻게든 고유를 추궁하여 죽이고자 자간령사(刺奸令史)에 임명하였으나, 고유가 직무를 훌륭히 수행하였기 때문에 승상창조속[[승상]]창조속(丞相倉曹屬)에 임명하였다.
그 후 고유는 상서랑(尙書郞)에 임명되었고, 이후 승상이조속(丞相理曹屬) ·[[영천군 영천태수(중국)|영천]][[태수]](潁川太守) · 승상법조연(丞相法曹掾)을 역임하였다.
[[건안]]황초 (建安위)|황초]] 25년원년([[220년]]), [[조비|문제]](文帝)가 [[후한 헌제|헌제]]의 선양을 받아 [[위 (삼국)|위조위]](魏)의를 제위에 올랐다건국하였다. 이때 고유는 치서시어사(治書侍御史)에 임명되었고 [[관내후]]에 봉해졌고, 황초 4년(關內侯223년)에에는 [[정위 (관직)|정위]]로 봉해졌다승진하였다.
[[조예|명제]] (明帝) 즉위 시에는 연수정후(延壽亭侯)에 봉해졌으며, [[정시 (위)|정시]] (正始) 6년( [[245년 ]])에는 [[태상 ( 太常관직) |태상]]이 되었고 10일 후에는 [[사공 ( 司空관직) |사공]]에 임명되었으며, 정시 9년( [[248년 ]]) [[사도 ( 司徒관직) |사도]]로 전임하였다. ▼
[[황초 (위)|황초]](黃初) 4년([[223년]])에는 [[정위 (관직)|정위]](廷尉)로 승진하였다.
[[가평 (위)|가평]] (嘉平) 원년( [[249년 ]]), [[사마의]] (司馬懿)가 [[조상 (조위)|조상]] (曹爽)을 숙청했을 때 고유는 황태후의 조칙으로 가절행대장군사가절(假節 )·행[[대장군]]사(行大將軍事)에 임명되었고, 조상의 진영을 점거하는 공적을 세워 만세향후(萬歲鄕侯)에 봉해졌다. [[조모]] (曹髦)가 즉위하였을 때는 안국후안국[[열후|후]](安國侯)에 봉해졌으며, [[태위 (太尉)]]에 임명되었다. [[조환 |원제]] (曹奐)이가 즉위하였을 때는 식읍이 더해저 4천 호에 이르렀다. ▼
▲[[조예|명제]](明帝) 즉위 시에는 연수정후(延壽亭侯)에 봉해졌으며, [[정시 (위)|정시]](正始) 6년([[245년]])에는 태상(太常)이 되었고 10일 후에는 사공(司空)에 임명되었으며, 정시 9년([[248년]]) 사도(司徒)로 전임하였다.
[[경원 (위)|경원]] (景元) 4년( [[263년 ]]), 90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고 손자 고혼(高渾)이 뒤를 이었다. ▼
▲[[가평 (위)|가평]](嘉平) 원년([[249년]]), [[사마의]](司馬懿)가 [[조상 (조위)|조상]](曹爽)을 숙청했을 때 고유는 황태후의 조칙으로 가절행대장군사(假節行大將軍事)에 임명되었고, 조상의 진영을 점거하는 공적을 세워 만세향후(萬歲鄕侯)에 봉해졌다. [[조모]](曹髦)가 즉위하였을 때는 안국후(安國侯)에 봉해졌으며, 태위(太尉)에 임명되었다. [[조환]](曹奐)이 즉위하였을 때는 식읍이 더해저 4천 호에 이르렀다.
▲[[경원 (위)|경원]](景元) 4년([[263년]]), 90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고 손자 고혼(高渾)이 뒤를 이었다.
== 고유의 친족관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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