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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흘과 이택의 벼슬살이는 그래도 그 중에서 잘한 점이 있다 하겠으나, 원준량은 갖가지로 재물을 긁어 들여 군졸들이 원망하고 괴로와하면서 날마다 파직되어 가기만 고대하였다. 그런데도 윤원형 등이 일찍이 그의 뇌물을 받았기에 파직되어 갈릴까 염려되어 이렇게 임금을 속이어 아뢰었으니, 앞으로 저런 재상을 어디에 쓰겠는가."<ref>[조선왕조실록 명종 30권 19년의 6월 21일]</ref>}}
 
이후 그는 [[오위]]에 입대하여 [[충순위]](忠順衛<ref name="mukwa02">[http://people.aks.ac.kr:7080/front/tabCon/exm/exmView.aks?exmId=EXM_MU_6JOa_1567_025024&isEQ=true&kristalSearchArea=B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깨진 링크|url=http://people.aks.ac.kr:7080/front/tabCon/exm/exmView.aks?exmId=EXM_MU_6JOa_1567_025024&isEQ=true&kristalSearchArea=B }}</ref>)에 병력으로 배치된다. 이후 [[무과]]에 여러 차례 응시했으나 낙방한다. [[1567년]](선조 즉위년) [[식년시|식년]] [[무과]]에 을과(乙科) 2위<ref name="mukwa02"/> 로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변방에 파견되어 [[이일]] 등과 함께 [[함경도]] 일대에서 [[조산보]][[만호]](造山堡萬戶)로 부임하였다. 한편 백호 [[윤휴]]는 백호전서에 그를 천거한 인물로 해평군(海平君) 윤근수(尹根壽)와 영의정 이산해(李山海)가 그를 천거 발탁했다고 하였다.
 
그뒤 방답진[[첨사]](防踏鎭僉使)로 전출되었다가 알수 없는 이유로 강등되어<ref>거제읍지</ref>, [[1575년]](선조 9년) 잠시 [[거제군|거제]][[현령]]으로 부임했다가 다시 [[함경도]] 일대에서 [[조산보]][[만호]]에 재임명되었다. [[1583년]](선조 17년) [[여진족]] 이탕개(尼湯介)의 부락을 토벌한다. [[조산보]]만호로 참여한 공으로 [[부령]][[부사]](富寧府使)로 특진했다. 이어 [[종성군|종성]]부사를 지냈고, [[1591년]](선조 24)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되었으나 별다른 성과없이 전라좌수사에 제수되었다는 [[사간원]]의 비판으로 체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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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임진왜란}}
* 정사 기준
동래에 부임했을 때 전쟁 장비와 수군은 부족했고 기강은 해이해져, 주변에서 수군을 모집하고 군대를 정비했다.<ref name="브리태니커_1">[http://100.nate.com/dicsearch/pentry.html?s=B&i=176139&v=44 원균]{{깨진 링크|url=http://100.nate.com/dicsearch/pentry.html?s=B&i=176139&v=44 }}, 《브리태니커 사전》</ref>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두 달 전인 [[1592년]]([[선조]] 25년) 2월에는 가배포에서 73척의 군선 지휘를 맡았다.
 
{{인용문|처음 적병이 한 방향으로 거제를 향하였다. 경상 우수사 원균이 우후(虞侯)를 시켜 병영을 지키게 하고 백천사(白川寺)에 달려가서 관망하다가 '''우리나라 어선을 적선인 줄 알고 당황하여 노량(露梁)으로 물러났다.''' 우후가 그 소문을 듣고 성중 노약자(老弱者)를 나가라고 독촉하니 죽은 자가 많았다. 어느 섬의 군사가 그 형세를 보고 모두 흩어졌다. 남해 현령 기효근(奇孝謹)은 창고를 불태우고 달아났다. 원균은 적이 여러 성을 연달아 함락시켰다는 말을 듣고 주사(舟師)를 인솔하고 가덕도(加德島)로 향하다가 적선이 바다를 뒤덮으며 오는 것을 보고 퇴각하여 돌아오니 여러 장수도 차차 흩어져 갔다. '''원균이 육지에 올라 적의 칼날을 피하려 했다. 기문(記問)에는 전선 백여 척과 화포와 군기를 다 바다에 빠뜨리고 홀로 비장(裨將)을 데리고 곤양으로 달아났다 했다. 옥포 만호 이운룡(李雲龍)이 항의하되, "사또가 나라 중책을 맡았으니 의리로 보아 그 관할 경내에서 죽을 것이며 여기는 호서ㆍ호남으로 들어가는 길목이니 여기를 잃어버리면 호서ㆍ호남이 모두 위태롭습니다. 지금 우리 군사가 비록 흩어졌으나 오히려 모을 수 있고, 호남 수군에게도 구원을 청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기문에는 그 비장 이영남의 말을 써서 구원병을 청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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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원균선무공신교지02.jpg|섬네일|left|200px|원균의 [[선무공신]] 교지 ([[1603년]])]]
 
원균은 고기를 매우 좋아하고 장수답지 않게 체구가 비대했다.<ref>조경남, [http://db.itkc.or.kr/itkcdb/text/nodeViewIframe.jsp?bizName=MK&seojiId=kc_mk_b002&gunchaId=av003&muncheId=&finId=005&NodeId=mk_s_all-kc_mk_c003 난중잡록 3]{{깨진 링크|url=http://db.itkc.or.kr/itkcdb/text/nodeViewIframe.jsp?bizName=MK&seojiId=kc_mk_b002&gunchaId=av003&muncheId=&finId=005&NodeId=mk_s_all-kc_mk_c003 }} 정유년 7월 13일</ref> 원균은 엄청난 비만이였다. 이러한 원균의 체형과 무능함을 조합해서 [[전라남도]] [[곡성]]에 사는 생원인 오천뢰(吳天賚)는 원균을 비꼬는 한시를 지었다.
 
{{인용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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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피디아|101013000778962}}
* [http://weekly.hankooki.com/lpage/culture/200701/wk2007012214450237140.htm <nowiki>[</nowiki>종가기행 33<nowiki>]</nowiki> 原州 元氏 原陵君 元均(원주 원씨 원릉군 원균)] 한국일보 2007/01/22일자
* [http://www.cha.go.kr/unisearch/Uniresult_Db_View.jsp?VdkVgwKey=12,11330000,31&queryText=원릉군원균선무공신교서 원균 선무공신교서:문화재청]{{깨진 링크|url=http://www.cha.go.kr/unisearch/Uniresult_Db_View.jsp?VdkVgwKey=12%2C11330000%2C31&queryText=%EC%9B%90%EB%A6%89%EA%B5%B0%EC%9B%90%EA%B7%A0%EC%84%A0%EB%AC%B4%EA%B3%B5%EC%8B%A0%EA%B5%90%EC%84%9C }}
* [https://web.archive.org/web/20140407085535/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weekly/2005/05/04/200505040500013/200505040500013_2.html 원균:만고충신 勇將 역사는 왜 그를 버렸나]
 
{{전임후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