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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업인 활동 ===
[[파일:YunTchiwang1929.JPG|썸네일|왼쪽|120px|형 [[윤치왕]]]]
[[1925년]] [[손정도]] 목사의 딸 [[손진실]]과 결혼하였다. 이때 손진실은 윤치창과 결혼 하겠다고 하는데 그녀의 아버지 손정도 목사는 탐탁치 않아하여 허락치 않고 있었다고 한다.<ref name="doga33">동아일보사, 《신동아 1992년 7월호》 (동아일보사, 1992) 352페이지</ref> 그때 독립군들이 돈을 얻어내기 위해 윤치창을 가두어 놓는 사건까지 겹쳤다고 한다.<ref>동아일보사, 《신동아 1992년 7월호》 (동아일보사, 1992) 352페이지<name="doga33"/ref> 우여곡절 끝에 탈출에 가까스로 성공하고 결혼하였다.
 
[[감리교]][[목사]]였던 [[손정도]]는 독립운동에 참여하여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장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교통부 총장으로 재직하였고, 나중에는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그의 아내 [[손진실]]은 시어머니 김정순과 같이 사는 것을 거부하였다. 또한 시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이복 시아주버니 [[윤치호]]의 집 주변을 지나갈 일이 있어도 한번도 시집에 들리지 않았다. [[윤치호]]는 이를 괘씸히 여겼다. [[1930년]]대 초반 아내 [[손진실]]의 권유로 도미, [[미국]]에서 체류하다가 [[1933년]] [[6월]] 귀국했다. [[1933년]] [[11월]]에는 [[보성전문학교]] 창립 30주년 기념사업회 발기인의 한사람으로 참여하고, [[보성전문학교]] 재단의 후견인의 한사람이 되었다.
 
[[1935년]] 처남인 [[손원일]]이 출옥하자, 그와 합작으로 [[남계양행]]이라는 상점을 5년간 공동운영하였다.<ref name="상점1">김창수·김승일, 《해석 손정도의 생애와 사상 연구》 (도서출판 넥서스, 1999) 419페이지</ref> 그 후 사업의 확장으로 [[중국]]에 건너가서 남계양행을 운영하다가 귀국, [[1939년]] [[7월]] 부동산 보영사(普榮社) 이사가 되었고, [[1942년]] 형 [[윤치왕]]과 동업, [[윤치왕]]이 세운 남포수산(南圃水産)의 이사가 되었으나 남포수산은 뒤에 사기꾼에게 넘어가 도산하고 말았다. 42년 9월 연료회사 중앙연료(中央燃料)의 이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