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민왕: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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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
1357년(공민왕 6) 문무백관에게 최초로 갓을 쓰도록 명하였다.<ref>[http://www.emuseum.go.kr/relic.do?action=view_d&mcwebmno=77832 갓집]{{깨진 링크|url=http://www.emuseum.go.kr/relic.do?action=view_d&mcwebmno=77832 }}</ref>
 
[[신돈]]의 개혁정책에 염증을 느껴 [[신돈]] 일파를 제거하면서 아들 [[고려 우왕|모니노]]의 생모가 [[신돈]]의 [[반야 (고려)|시비 반야]](般若)라는 점 때문에 혈통문제가 발생할 것을 예상, [[1374년]] [[9월]]에 아들 아들 [[고려 우왕|모니노]]의 존재를 알리고, 아들 [[고려 우왕|모니노]]의 생모는 [[궁인 한씨]]라고 공표하고, 한씨의 3대 조상과 그녀의 외조에게 벼슬을 추증한다.<ref>이성계는 집권 후 우왕의 혈통을 문제삼아 신돈의 자식이라고 주장했고, 조선왕조에서는 이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여 고려사, 고려사절요, 동사강목 등에 신우, 신창이라 기록하였다.</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