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키 히데야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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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행한 유소년기 ===
어린 오기마루는 이에야스의 미움을 받아 3세때까지만3세 때까지 아버지를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못했고, 이복형 [[마쓰다이라 노부야스(1559년)|노부야스]](信康)가 오기마루를 가엾게 여겨 아들로 인정하도록 이에야스를 설득하였다.설득하였다고 형 노부야스가 [[오다 노부나가]]의 명으로 자결한 후 집안의 후계자가 될 뻔 했으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양자 겸 인질로 보내졌다한다. 이후 생부와 양부의 이름을 하나씩 물려받은 히데야스(秀康)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에야스가 히데야스를 냉대한 이유에 대해서는 이에야스의 정실로 노부야스의 생모이기도 한 [[쓰키야마도노]](築山殿)를 두려워해서였다고도 하고, 쌍둥이로 태어났기 때문이라고도 하는데, 에도 초기인 간에이(寛永) 11년([[1634년]])에 편찬된 『나카무라 가 어유서서(御由緒書)』(中村家御由緒書)에는 「혼다 사쿠사에몬(本多作左衛門)이 이에야스에게 자세한 상황을 말씀드린 바, 이에야스는 무언가를 생각해두던 것이 있어 따르기 어렵다 하시니」라고만 적혀 있고, 이를 연구한 일본의 향토사학자 오구스 카즈마사(小楠和正)는 [[무토 가쓰요리]](武田勝頼)와의 전투와 직면해 있었던 이에야스로써는 히데야스를 하마마쓰 성(浜松城)으로 데려올 기회도 대면할 기회도 없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추정하고 있다.
 
[[덴쇼]](天正) 7년(1579년) 무토 가쓰요리와의 내통 의혹으로 인해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명령으로 형 노부야스가 할복 자결한다(최근에는 노부야스가 이에야스와 대립하고 있었기에 할복하게 된 것이라는 설도 제기되었다). 때문에 일단 이에야스의 차남이던 히데야스가 집안의 가독을 이을 뻔 했으나, 덴쇼 12년([[1584년]]) [[고마키 ・ 나가쿠테 전투]] 뒤에 이에야스와 [[도요토미 히데요시|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의 화친 조건으로 히데야스는 히데요시에게 보내져서 그의 양자(겸 인질)가 되었고, 이에야스의 후계자로는 이복동생인 나가마쓰(長松, 훗날의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되었다. 애초에 생모의 신분이 히데타다 쪽이 더 높았고, 노부야스가 자결한 뒤에 태어난 만큼 히데타다가 후계자로 거론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 청소년기 및 요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