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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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 북조선 (북한이라는 용어는 백:아님#국가에 위배되는 표현으로 위키백과에서는 '북한이탈주민' 등 고유명사 외의 사용을 지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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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건의 발생 ==
[[파일:Incorrect picture of Lt Barrett.jpg|섬네일|사건 당시의 모습.<br/>이 사진에 마크 배럿 중위는 찍혀 있지 않다(배럿 중위로 표시된 사람은 진 비클리(Gene Bickley) 하사이다)]]
문제의 [[미루나무]]는 당시 [[공동경비구역]]에서 25년생 15m 높이의 나무로서 [[대한민국]](이하 남한)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하 북한북조선) 양측이 상대방을 감시하기 위한 시계확보에 지장을 주고 있었다.
 
[[유엔사령부|유엔군]] 측 [[주한 미군]]은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안의 제5관측소에서 제3초소와 비무장지대를 관측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북한북조선 3개 초소에 둘러싸인 제3초소 부근에 미루나무 가지가 무성하게 자라있어 이를 제대로 관측할 수가 없었다.
 
1976년 8월 18일 오전 10시경 [[주한 미군]] 경비중대장 아서 조지 보니파스({{lang|en|Arthur George Bonifas}}, [[1943년]] [[4월 22일]]생) [[대위]]를 위시하여 소대장 마크 토머스 배럿({{lang|en|Mark Thomas Barrett}}, [[1951년]] [[6월 9일]]생) [[중위]] 등 2명과 [[부사관]]과 [[병사 (군사)|병]]<ref>[[대한민국 국군]]에서는 사병이란 단어 대신 이들을 구별하여 부른다.</ref> 4명, [[대한민국 국군]] [[장교]] 1명과 [[부사관]]과 [[병사 (군사)|병]] 4명 등 11명은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안의 '[[돌아오지 않는 다리]]' 남쪽 유엔군측 제3초소 부근에서 시야를 가린 [[미루나무]]의 전지작업을 하는 남한 [[노무자]] 5명의 [[작업]]을 [[감독]]·[[경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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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버니언 작전 시 [[유엔군]]은 [[전투준비태세|데프콘 2]](공격준비태세)를 발령하였다. 미국 본토에서 [[핵무기]] 탑재가 가능한 [[F-111]]전투기 20대가 한반도로 긴급 파견되었고, [[괌]]에서는 [[B-52 스트래토포트리스|B-52]] [[폭격기]] 3대, [[오키나와 섬|오키나와]] 카데나 미공군기지에서 이륙한 [[맥도넬더글러스 F-4 팬텀|F-4]] 24대가 [[한반도]] 상공을 선회하였다. 또한 함재기 65대를 탑재한 미[[해군]] 제7함대 소속 [[항공모함]] [[CV-41 미드웨이|미드웨이호]]가 [[순양함]] 등의 중무장한 호위함 5척을 거느리고 동해를 북상하여 [[한국]] 해역 인근에 배치되었다.
 
대한민국은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대한민국 육군 특수전사령부|특전사]] [[대한민국 1공수특전여단|제1 공수특전여단]] 김종헌 [[소령]]을 [[지휘관]]으로 하고 64인의 특전사 대원들로 구성된 결사대가 편성되어 보복작전이 실시됐다. [[M16 소총]], [[수류탄]], [[크레모아]] 등을 트럭에 숨기고 [[카투사]]로 위장한 64명의 특전사 요원들은 [[공동경비구역]] 내에서의 폴 버니언 작전에 투입되어 조선인민군 초소 4개를 파괴하였다. 조선인민군이 이에 무력대응할 경우엔 과감히 사살하여 보복을 완료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조선인민군이 이에 대응하지 않고 물러서서 더 이상의 무력사태로까지 확대되진 않았다.<ref>{{웹 인용 |url=http://nk.joins.com/news/view.asp?aid=3452296 |제목=북한의북조선의 판문점 ‘도끼 살해’ 만행 … 박정희 “미친 개엔 몽둥이” 분노 |저자=이상국 |출판사=중앙일보 |날짜=2009-08-24 |확인날짜=2014-10-17}}</ref>
 
== 경과 ==
[[파일:DMZ 10.JPG|섬네일|200px|판문점 내 남북 경계]]
폴 버니언 작전 종결 후 북한은북조선은 긴급 수석대표회의를 요청, 주석 직에 있던 [[김일성]]의 '유감성명'을 전달했다. 처음에 미국은 북한의북조선의 유감성명이 잘못을 인정한 것이 아니라며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다가 24시간 만에 태도를 바꿔 이를 수락하였다. 북한은북조선은 1년 반 동안이나 [[준전시상태]]를 풀지 않았고, 남한도 북한을북조선을 강력하게 비판하는 등 사건의 파문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이후 사건 당사자인 미국이 빠진 상태에서 남한과 북한북조선 간의 군사적 긴장상태가 지속되었다. 이후 판문점 내의 공동경비구역에서도 경계가 설정되었으며, 경계 밖 상대 지역에 존재하던 초소는 철거되었으며, [[콘크리트|혼응토]] 단으로 경계를 표시하였다. 사건 10주년인 1986년 8월 18일에는 근처에 있는 캠프 키티호크({{lang|en|Camp Kitty Hawk}})가 보니파스 대위를 기려 [[캠프 보니파스]]로 개칭되었다.
 
== 같이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