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시데리위스 에라스뮈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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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터 ====
[[마르틴 루터]]는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새로 번역한 후 에라스무스로부터 인정받으려 했다. [[1517년]] 95개조 논제를 발표하고 교회에[[서방교회]]의 정면으로개혁에 맞섰던앞섰던 루터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명망 있는 인물이었던 에라스뮈스의 지지를 받고자 했던 것이다. 에라스뮈스는 교회에 대한 루터의 비판이 옳다고 생각했지만, 루터의 비판이 결과적으로 [[인문주의자]]들이 그토록 반대했던 교회 내의 수구 세력과 편협한 수도사들의 입장만 확고하게 만들어줄 것이라고 판단했다. 따라서 그는 “격렬한 언동보다 정중한 중용을 지킴으로써 더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는 말로 루터의 제의를 정중히 거절했다.<ref name="지만지"/> 여기서 에라스뮈스가 말하는 중용은 곧 관용에 대한 호소이자 [[평화]]의 추구였다. 루터가 [[교황]]에게서 이단자 선고를 받게 되었을 때, 루터를 박해로부터 지켜주기 위해 에라스뮈스가 마인츠 대주교에게 올린 진정서는 그가 설파한 중용 정신이 어떤 것인지를 명백히 보여준다. “불화는 인간을 야수로 만든다. 화합은 죽음 이후에 영혼들을 하느님과 결합시킨다.” 100년 후 [[유럽]] 여러 나라들이 [[종교전쟁]]을 종식시키고 [[베스트팔렌 조약]]을 맺었을 때 그 조약의 원리는 바로 에라스뮈스가 주장했던 평화와 종교적 관용의 정신이었다.<ref name="지만지"/>
 
=== 논쟁의 시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