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키 히데야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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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부였던 히데요시가 죽고 게이초 5년(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의 전초전이 될 아이즈 정벌(会津征伐)에 참전하였다. [[우에스기 가게카쓰]](上杉景勝)에 호응하는 형태로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가 거병하고, 이에야스는 오야마 평정(小山評定)을 열어 다른 무장들과 함께 서쪽으로 갈 것을 결정한다. 이때 이에야스에게 있어 본대는 이에야스 자신이 이끌고 [[도카이도]](東海道)에서, 그리고 별동대를 히데타다가 이끌고 주산도(中山道, [[도산도]]東山道)로 진군하기로 하였으며, 히데야스는 우쓰노미야(宇都宮)에 머무르며 우에스기 가게카쓰를 막게 되었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히데야스는 이에야스로부터 시모유키[[시모사국|시모사]] 유키성(下総結城) 10만 1천 석에서 [[에치젠 국|에치젠]](越前) 기타노죠기타노조(北庄) 68만 [[고쿠다카|석]]으로 영지가 가증되어 이봉된다. 유키 집안을 대대로 섬긴 가신들 가운데는 에치젠으로 이봉되기를 거부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는데, 때문에 이러한 에치젠 이봉은 최종적으로는 재지 유력자들의 재지 이탈을 강제하는 기능도 있었기에 그 결과 히데야스는 자신의 권력에 있어서 구세력이라 할 수 있는 유키 씨의 입김으로부터 온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게이초 9년([[1604년]])에는 히데야스 자신의 본래 성씨인 마쓰다이라 씨마쓰다이라씨(松平氏)로의 복귀하는 것도 허락받았다는 사료도 존재한다.
 
게이초 10년([[1605년]]) 곤노주나곤곤주나곤(権中納言)이 되었다. 게이초 11년([[1606년]]) 9월 21일에 교토 [[후시미 성후시미성]](伏見城)의 유수거(留守居)를 명받았으나, 병을 얻어 직무 수행이 어려웠기에 게이초 12년([[1607년]]) 3월 1일에 에치젠으로 돌아와야 했고, 그대로 윤4월 8일에 사망하였다. 향년 34세였다.
 
히데야스의 사인은 『당대기』(当代記)에 「日来唐瘡相煩、其上虚成」라고 되어 있어 [[매독]]이 아니었나 추정되고 있다. 또한 매독이 직접적인 사인이 아니라 매독에 의한 쇠약증이 원인이 되어 사망했다는 지적도 있다. 한편 마나세 겐사쿠(曲直瀬玄朔)의 『의학천정기』(医学天正記)에는 「越前宰相殿、瀉利・発熱・咽渇・五令ニ加滑」라고 되어 있는데 다른 난치병도 복합적으로 히데야스의 죽음에 작용하고 있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유키 가문의 보리사(菩提寺)로 조동종(曹洞宗) 사찰인 효현사(孝顕寺)에서 화장되어 계명은 효현사전전삼품황문취모월산대거사(孝顕寺殿前三品黄門吹毛月珊大居士)라 추호하였으나, 도쿠가와 집안이나 마쓰다이라 집안이 귀의해 있던 정토종(浄土宗)의 장례 절차를 따르지 않은 것을 이에야스가 한탄했기에 교토 지온인(知恩院)의 만예(満誉) 대사를 불러 새로 운정사(運正寺)를 짓고 그곳에 옮겨 모시고 계명도 '''정광원전전삼암도위운정대거사'''(浄光院殿前森巖道慰運正大居士)'''라 하였다.
 
에치젠 68만 석은 적남 [[마쓰다이라 다다나오 (1595년)|다다나오]](忠直)가 이었다.
 
== 직계 가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