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용: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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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
 
=== 긍정적 평가 ===
 
일단, 그는 조선의 문을 닫은 장본인이고 일본을 끌어들인 것은 맞으나, 그가 있었기 때문에 왕통(王統)의 단절만은 면했다. 그가 일본과 교섭한 결과, 일제시대에도 이왕직(李王職), 왕세자부(王世子附) 등을 통해서 왕실의 명맥만은 유지가 되었으며, 왕족 대부분이 조선인 귀족으로서 일제시대에도 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는 데는 평가가 일치한다. 과거 대한 제국의 지배층들 역시 일본에 귀순한다는 조건으로 귀족 작위를 받게 했고, 멸문을 당하게 하지는 않았다. 즉, 조선은 망했어도 왕실만은 남긴 것이다. 이는 그의 일본에 대한 기민한 외교적 대응이 효과가 있었고 이토 히로부미 등 일본 내 온건파들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최소한의 것들은 얻어냈다. 그래서 왕이 보는 앞에서 태연히 나라를 넘기는 조약 문구에 서명을 했음에도 실제로 고종과 순종 모두 그를 특별히 경원하거나 내치지 않았고 특히 순종은 이완용이 와병하는 동안 갖가지 위문품을 보내기도 했다.{{출처|날짜=2018-06-06}}
 
같은 친일파 [[박중양]](朴重陽)은 1945년 해방이후 이완용을 '역사의 희생자'라며 변호하였다. 그를 매국노라 매도하긴 쉽지만 국가가 위급존망한 때를, 지도자가 되어 이완용 같이 깔끔하게 일처리를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하였다<ref name="min">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 9권》(민족문제연구소, 1996)</ref>{{rp|15}}. 이어 '폭풍노도와 같은 대세를 항거하는 것은 어차피 불가능한 일이었고 국난을 당하여 분사(憤死)하는 자가 있을지라도 그것이 사상계의 자극은 될 지언정, 부국제민(扶國濟民)의 방도는 아니다. 하물며 관직을 사퇴하고 도피하는 것은 무책임한 자의 행동<ref name="min"/>{{rp|15}} 일 뿐이다.'라며 이완용이 모든 악역을 자처했다고 변호했다. 그는 '누구라도 이완용과 동일한 경우의 처지가 된다면 이완용 이상의 선처할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라며 이완용 등은 단순히 매국노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는 을사조약 때나 경술국치 이후 관직을 내놓았던 일부 양심 인사들, 또한 그들을 존경하던 사람들과 엄청난 논쟁거리가 되었다.
 
한편, 신중히 생각해서 결정을 내리며 한 번 결심한 일은 반드시 성취하는 의지가 굳은 인물이라는 하마평이 있었다. 육영공원(育英公院)에서 처음 접해보는 영어와 서양 학문들이었을 텐데도 매우 우수한 학습 능력을 보여줬다. 당대 최고 평판의 서예가이기도 했으며 실제로 [[독립문]] 현판을 직접 쓰기까지 했다. 그가 [[독립협회]] 위원장직을 지낸 시절, 각종 국민 계몽 활동에 열심을 냈고 [[독립신문]]을 대대적으로 지원하기도 했다. 그리고 [[독립문]] 설립에 앞장서 독립의지를 국내외에 알렸던 과거가 있었고, 당시에 한해서는 그의 독립 의지가 진심이었다는데는 이견이 없다.
 
특히 [[아관파천]] 이후 러시아의 각종 이권 요구를 막아낸 이완용을 [[서재필]]은 [[독립신문]] [[1897년]] [[11월 11일]] 자 논설을 통해 "이완용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나라를 위해 외국에 이권을 넘겨주는 것에 반대했다"면서 "대한의 몇 째 아니 가는 재상"으로 극찬하고 있다<ref name="chosunchirashi"/>. 이완용과 동시에 과거에 급제했던 서재필은 갑신정변의 주동자로 부인과 젖먹이 아들까지 죽임을 당하고 [[미국]]으로 도망가 갖은 고생을 다했었고<ref group="*">서재필은 과거급제동기 이완용이 주미공사로서 미국에서 엘리트 외교관으로 잘나가던 당시, 같은 미국땅에서 갖은 죽을 고비를 넘기며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굶주림과 피부병에 시달렸고, 그의 거지꼴을 불쌍하게 생각한 미국인 독지가들의 도움으로 겨우 미국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았고 인종차별을 당하면서도, 역적으로 몰려 음독자살한 처와 굶어죽은 젖먹이 자식, 그리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부모, 동생들을 떠올리며 처절하게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다.</ref>, 당연히 [[수구당|수구파]]의 좌장격인 이완용에게 감정이 좋지 않았을 터였음에도 칭찬한 것이다. 물론 이완용이 이후, 서구식 참정권을 주장하는 [[개화당|개화파]] 계열 독립협회원들을 공격하고 이내 협회내 모든 간부직에서 자진 사퇴하자 둘 사이의 틈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었으며, 수구파들을 대동하여 친일 개화파들과 짬짜미해 임금과 백성을 속이고 일본에 나라를 팔자 [[서재필]]은 더 큰 증오와 멸시를 보내게 된다.
 
=== 부정적 평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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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의 손자이자, 죽은 둘째아들을 대신하여 장손으로 입적한 자인 이병길도 친일파였다.이완용이 죽은 뒤, 일제 후작 작위와 전재산을 상속 받은 병길은 조선귀족회 이사와 조선임전보국단 이사,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 등을 지내며 일제에 적극 협력했다. <ref>{{뉴스 인용|url=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49651#csidxf27fee78cf855a99bf3fad1e981cf59|제목=이완용 불륜 때문에 아들이 자살?|성=미디어오늘|날짜=2006-09-01|뉴스=미디어오늘|언어=ko|확인날짜=2018-07-19}}</ref>
=== 긍정적 평가 ===
일단, 그는 조선의 문을 닫은 장본인이고 일본을 끌어들인 것은 맞으나, 그가 있었기 때문에 왕통(王統)의 단절만은 면했다. 그가 일본과 교섭한 결과, 일제시대에도 이왕직(李王職), 왕세자부(王世子附) 등을 통해서 왕실의 명맥만은 유지가 되었으며, 왕족 대부분이 조선인 귀족으로서 일제시대에도 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는 데는 평가가 일치한다. 과거 대한 제국의 지배층들 역시 일본에 귀순한다는 조건으로 귀족 작위를 받게 했고, 멸문을 당하게 하지는 않았다. 즉, 조선은 망했어도 왕실만은 남긴 것이다. 이는 그의 일본에 대한 기민한 외교적 대응이 효과가 있었고 이토 히로부미 등 일본 내 온건파들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최소한의 것들은 얻어냈다. 그래서 왕이 보는 앞에서 태연히 나라를 넘기는 조약 문구에 서명을 했음에도 실제로 고종과 순종 모두 그를 특별히 경원하거나 내치지 않았고 특히 순종은 이완용이 와병하는 동안 갖가지 위문품을 보내기도 했다.{{출처|날짜=2018-06-06}}
 
같은 친일파 [[박중양]](朴重陽)은 1945년 해방이후 이완용을 '역사의 희생자'라며 변호하였다. 그를 매국노라 매도하긴 쉽지만 국가가 위급존망한 때를, 지도자가 되어 이완용 같이 깔끔하게 일처리를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하였다<ref name="min">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 9권》(민족문제연구소, 1996)</ref>{{rp|15}}. 이어 '폭풍노도와 같은 대세를 항거하는 것은 어차피 불가능한 일이었고 국난을 당하여 분사(憤死)하는 자가 있을지라도 그것이 사상계의 자극은 될 지언정, 부국제민(扶國濟民)의 방도는 아니다. 하물며 관직을 사퇴하고 도피하는 것은 무책임한 자의 행동<ref name="min"/>{{rp|15}} 일 뿐이다.'라며 이완용이 모든 악역을 자처했다고 변호했다. 그는 '누구라도 이완용과 동일한 경우의 처지가 된다면 이완용 이상의 선처할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라며 이완용 등은 단순히 매국노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는 을사조약 때나 경술국치 이후 관직을 내놓았던 일부 양심 인사들, 또한 그들을 존경하던 사람들과 엄청난 논쟁거리가 되었다.
 
한편, 신중히 생각해서 결정을 내리며 한 번 결심한 일은 반드시 성취하는 의지가 굳은 인물이라는 하마평이 있었다. 육영공원(育英公院)에서 처음 접해보는 영어와 서양 학문들이었을 텐데도 매우 우수한 학습 능력을 보여줬다. 당대 최고 평판의 서예가이기도 했으며 실제로 [[독립문]] 현판을 직접 쓰기까지 했다. 그가 [[독립협회]] 위원장직을 지낸 시절, 각종 국민 계몽 활동에 열심을 냈고 [[독립신문]]을 대대적으로 지원하기도 했다. 그리고 [[독립문]] 설립에 앞장서 독립의지를 국내외에 알렸던 과거가 있었고, 당시에 한해서는 그의 독립 의지가 진심이었다는데는 이견이 없다.
 
특히 [[아관파천]] 이후 러시아의 각종 이권 요구를 막아낸 이완용을 [[서재필]]은 [[독립신문]] [[1897년]] [[11월 11일]] 자 논설을 통해 "이완용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나라를 위해 외국에 이권을 넘겨주는 것에 반대했다"면서 "대한의 몇 째 아니 가는 재상"으로 극찬하고 있다<ref name="chosunchirashi"/>. 이완용과 동시에 과거에 급제했던 서재필은 갑신정변의 주동자로 부인과 젖먹이 아들까지 죽임을 당하고 [[미국]]으로 도망가 갖은 고생을 다했었고<ref group="*">서재필은 과거급제동기 이완용이 주미공사로서 미국에서 엘리트 외교관으로 잘나가던 당시, 같은 미국땅에서 갖은 죽을 고비를 넘기며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굶주림과 피부병에 시달렸고, 그의 거지꼴을 불쌍하게 생각한 미국인 독지가들의 도움으로 겨우 미국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았고 인종차별을 당하면서도, 역적으로 몰려 음독자살한 처와 굶어죽은 젖먹이 자식, 그리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부모, 동생들을 떠올리며 처절하게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다.</ref>, 당연히 [[수구당|수구파]]의 좌장격인 이완용에게 감정이 좋지 않았을 터였음에도 칭찬한 것이다. 물론 이완용이 이후, 서구식 참정권을 주장하는 [[개화당|개화파]] 계열 독립협회원들을 공격하고 이내 협회내 모든 간부직에서 자진 사퇴하자 둘 사이의 틈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었으며, 수구파들을 대동하여 친일 개화파들과 짬짜미해 임금과 백성을 속이고 일본에 나라를 팔자 [[서재필]]은 더 큰 증오와 멸시를 보내게 된다.
 
== 대중문화에서 이완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