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화단 운동: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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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독일 외교공사관인 케텔러 사망에 대한 사과 사절로 [[재풍|순친왕]]이 독일로 갔는데 외교관 자격이 아닌 사과 사절이어서 용서를 빌러 온 죄인 신분의 치욕적인 대우로 받았으나 순친왕의 로비 결과 독일 황제 [[빌헬름 2세]] 앞에서 무릎을 꿇는 수모는 겨우 모면했다.<ref name="먼나라이웃나라"/>
 
[[신축 조약]]은 배상금 채무 문제에서 관세와 염세를 담보를 하는 것이었으므로 [[청나라]] 경제에 커다란 타격을 엄청난 배상금과 철도연변의 외국군 주둔 등 조약의 내용은 사실상 청나라를 완전히 무장해제 시킨 격이며, 발가벗고 손발이 꽁꽁 묶인 [[청나라]]는 열강들의 침략 앞에 무방비로 던져진 셈이었다.<ref name="먼나라이웃나라"/> 주었다.<ref name="의화단"/> 열강의 국가별 배상금 배분은 러시아 29%, 독일 20%, 프랑스 16%, 영국 11%, 미국과 일본은 각 7%였다.<ref name="의화단"/> 그런데 배상금의 지불은 [[1901년]]부터 [[1938년]]까지 30년으로 [[청나라]] 말기까지 11년, [[중화민국의 역사|중화민국]] 시기 27년으로 되었다. 그러나 지불정지, 조건의 완화등으로 되돌려 받게 된 것이 약 5억 여 냥이었다. 즉 뒷날 [[제1차 세계대전]]에 중국이 참전하여 [[독일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게 줄 배상금을 지불 정지하였고, 참전국은 5년 동안 유예, [[러시아 제국]]은 혁명으로 포기하여 약 5억 여 냥을 되돌려 받은 셈이 된다.<ref name="i">《근대중국:개혁과 혁명-중화제국 마지막 왕조의 몰락(下)》,신승하 저. 대명출판사. p441</ref>
 
[[신축 조약]] 체결된 이후 [[1901년]] [[10월 6일]], [[서태후]]와 [[광서제]]는 [[시안]]을 출발하여 동관(潼關)을 나와 [[뤄양]]을 경유하여 다음해인 [[1902년]] [[1월 7일]]에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서태후는 [[의화단]]을 적으로 선포하고 패전의 책임을 물어 의화단 진압을 명함으로써 의화단 사건은 수습되었다.<ref name="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