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백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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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선조와 배경===
한백겸은 [[1552년]]에 태어났다. 그의 선조는 [[조선]]왕조의 개국공신으로 영의정을 지낸 [[한상경]](韓尙敬)이며, 한상경의 손자로 좌찬성을 지낸 [[한계희]](韓繼禧)가 한백겸의 직계 선조가 되었다.
===학문연마와 관직생활===
한백겸은
===사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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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백겸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죽음을 애석해하며 통곡하던 친구들이 많았다. 당대의 재상이며 한백겸의 절친한 친구였던 오성 [[이항복]]이 최초로 통곡한 사람으로 그는 한백겸의 죽음에 제문을 바쳤다. 이항복은 우선 한백겸이 당대의 주역 연구의 큰 학자라 하였으며, 모든 경서에 두루 밝았으나 유독 주역에 깊은 연구가 있어 당시의 세상에서 모두 그가 큰 주역학자임을 인정했다고 하였다.<ref name="경향신문"/> 또 다른 친구로 대제학에 이조판서를 지낸 우복 [[정경세]](鄭經世)가 있는데, 뒤에 정경세는 한백겸의 [[묘갈명]]을 지어 한백겸은 당대의 주역학자로 국가에서 간행한 ‘주역전의(周易傳義)’라는 책의 교정을 맡았다고 하며 칭송하였다.<ref name="경향신문"/>
‘반계수록’과 ‘동국여지지(東國輿地誌)’를 쓴 반계 [[유형원은]] “오직 근세의 한백겸이 변론했던 것이, 천년동안 정해지지 못했던 것을 깊이 알아냈으니 그분의 학설에 의해서 확정한다”고 격찬하며 그의 학설을 그대로 수용하였고, 여암 [[신경준]], 순암 [[안정복]] 등도 한백겸 학설에서 일정분의 영향을 받았음이 확인되고 있다. 실학의 집대성자 다산 정약용도 그의 저서 ‘강역고’에서 “한백겸의 학설은 바꿀 수 없는 정론(定論)”이라고 단정하여 높은 수준의 학문이라고 평가하고 있다.<ref name="경향신문"/> 역사학자 [[이기백]] 교수는 구암유고 동국지리지 서문에서 “그의 주장이 반드시 옳았다고 할 수는 없으나, 당시의 학문적 수준에 비추어볼 때 그의 주장은 실로 놀랍도록 참신한 새 학설이었다. 그러기에 그의 주장은 반계 유형원, 성호 이익, 다산 정약용 등 여러 실학자들의 전제개혁론에 큰 영향을 미치고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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